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뿌리이다

by 박은석


오늘은 광복 77주년 기념일이다.

77년 전 이날이 어떤 날이었기에 한 세대, 두 세대가 넘게 이날을 기념하는 것일까?

그 의미를 찾아야 하고 그 의미를 확고히 새겨야 하고 그 의미를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광복절이 오면 나라가 시끄럽다.

77년 전에는 “대한독립만세!”의 소리로 시끄러웠는데 요즘에는 다른 소리 때문에 시끄럽다.

그 소란스러움의 한복판에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가 있다.

상해임시정부를 생각할 때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결과물이 확연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더 큰 뜻을 가진 분들이 한반도를 떠나서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19년 4월 11일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세웠으니까 망명정부였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비록 모든 환경이 열악했지만 국제사회에서 엄연히 대한민국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정부였다.




일찍이 중학교 시절에 배운 내용이 있다.

국가 형성의 3요소가 있는데 국민과 영토와 주권이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 3가지 요소가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달랐다.

한반도에 국민은 2천만 명이나 있었다.

분명히 땅도 있었고 국민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땅은 빼앗긴 땅이다.

우리 땅이지만 우리 땅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주권도 없었다.

우리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우리말을 쓸 수 없었고 우리 글을 쓸 수도 없었으며 우리 이름도 마음대로 짓지 못했다.

그러니 일제강점기를 온전한 국가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상해에 있었던 대한민국 정부를 임시정부라고 부르는 것이다.

빼앗긴 땅과 주권을 찾기 전까지는 ‘임시’라는 딱지를 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남의 땅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라고 해도 엄연한 한 나라의 정부이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훙커우공원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 수석이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한 것은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정부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이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한 것도 대한민국 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상해임시정부가 영토와 주권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해서 폄훼해서는 안 된다.

국가 형성의 3요소가 실질적으로 온전하게 이루어진 날은 1948년 7월 17일이다.

영토는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회복되었지만 1948년에 비로소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우리의 헌법은 1987년까지 총 9번에 걸쳐 수정되었다.

개헌될 때마다 문장이 조금 달라지긴 했다.

하지만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된 최초의 헌법과 가장 최근인 1987년 10월 29일의 개헌헌법이 강조하는 게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이 문장이 1947년에 7월에 제정되고 반포된 최초헌법이다.

그리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이 문장이 1987년 10월의 9차 개헌헌법 전문의 첫 문장이다.

최초의 헌법을 제정할 때, 국민들은 상해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정부로 분명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헌법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1945년 8월 15일에 “조선독립만세”가 아닌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1897년에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1910년에 일제에 병탄되었다.

그 큰 아픔 속에서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독립하고 백성이 주인 되는 ‘민국’을 만들자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뿌리이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도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제 이 문제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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