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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Sep 27. 2022

아픔 때문에 위대한 역사가 되기도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역사가 발전하게 된 것은 인류에게 닥친 엄청난 도전에 대해서 인류가 응전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 말은 국가나 공동체의 역사에도 해당되는 말이지만 개인의 역사에도 해당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한다.

때로는 그 도전이 우리를 둘러싼 자연환경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때로는 공동체로부터 오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때로는 나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거리일 수도 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고민거리들 앞에 서 있으면 저절로 힘들다는 말이 나온다.

이때 우리 마음에 그 힘든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고민이 생긴다.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몰려온다.

극복하지 못하면 역사 앞에 패배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인들은 그때를 잘 극복한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못할 것 같다.

열등감은 그렇게 찾아온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나보다 나은 것 같다.

잘 사는 것 같고 건강한 것 같고 능력을 잘 발휘하는 것 같다.

외나무다리 앞에 서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잘 넘어갔고 이제 내 차례가 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고소공포증도 있고 어지럼증도 있어서 간이 콩알만 해졌다.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응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비웃으며 야유를 보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데 피할 수가 없다.

속으로 ‘어떡해 어떡해’라는 말만 되뇌고 있다.

빠릿빠릿한 성격이면 좋겠는데, 상황판단을 잘했으면 좋겠는데, 챙겨야 할 것 잘 챙기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분명히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데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있다.

응전을 못 하니까 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남들은 다들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왜 이렇게 못할까?’ 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떡해야 하나?




혹시 너무 거창한 것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에게 닥친 도전들은 꼭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 어떤 사람도, 역사상 어떤 사람도 자신에게 닥친 도전들에 대해서 완벽하게 응전한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 수많은 도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물을 잘 다스리는 군주가 위대한 군주라고 했다.

그렇다면 거대한 강물을 막아서 댐을 만들고 물길을 다른 곳으로 뺐다면 성공한 것일까?

그 당시에는 그렇게 했기 때문에 홍수를 막을 수 있게 되었고 강에서 먼 곳까지 물을 끌어와서 관개농업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칭찬이 자자했을 것이다.

과연 성공한 것일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물을 막고 물길을 빼돌렸기 때문에 강 하류 지역에서는 갑자기 물이 말라버리는 대재앙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응전해서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성공이 아닐 수도 있다.




토인비는 19세기에 태어난 영국 사람이다.

그 시대의 영국인들이라면 자신들이 거대한 도전에 응전했고 그 결과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 나라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으니 그 자부심이 오죽했을까?

하지만 홍콩을 빼앗긴 중국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식민지로 전락한 인도는 어떻고?

버마족의 이름으로 불린 미얀마 사람들은 어땠을까?

그들은 대영제국이라는 역사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한 패배자들이니까 역사 속에서 지워져야 할 존재라고 봐야 할까?

따지고 보면 영국도 수 세기 동안 로마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했다.

게르만족의 도전에도 응전하지 못했다.

그들도 쓰디쓴 패배의 경험이 있다.

도전에 응전해야만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도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도 역사이다.

속상하고 눈물 나고 아무 말 하지 못 할 수도 있지만 그 아픔 때문에 위대한 역사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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