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말도 한다.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은 빨리 갔으면 좋겠다 하신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는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면, 과연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상황이 주어져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일까?
이러저러한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딱히 답이 없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하는데, 사는 것과 죽는 것 중에 어떤 게 좋은지 아는 사람이 없다.
사람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경험을 해야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이란 것은 우리 일생에 딱 한 번밖에 겪는 사건이다.
죽음을 경험해 본 후 알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러니 사는 게 좋은지 죽는 게 좋은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어르신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인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말은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힘들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삶과 죽음을 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삶을 택할 것이다.
그래도 굉장히 살기 힘든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사람이 죽음을 택할까?
아니다.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죽음을 택하는 사람보다 삶을 택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한국전쟁을 몸소 겪으신 분들에게 여쭤본 적이 있다.
피난 가는 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었냐고 여쭸더니 그런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고들 하셨다.
그때는 어떻게든 살려고 했다고 하셨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피난 갔다고 해서 삶이 보장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기어코 피난길을 택했다.
재난 영화를 보면 제목이 어떻든지 그 내용은 비슷하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모든 등장인물이 어떻게든 살려고 한다.
물론 여러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말 죽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말,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사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있는데 그 삶에서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다.
빠져 있는 그것이 충족되면 더 이상 그런 말을 내뱉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유대인 학살을 자행하던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었다.
그곳에서 그는 매일매일 죽음의 상황에 직면하였다.
살아서 그곳을 나갈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보였다.
그도 속으로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말을 백번도 천번도 더 했을 것이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쉬워 보였다.
살아야 한다면 그에게 살아야 할 의미가 분명히 있어야 했다.
그래서 프랭클 박사는 그곳에서 죽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시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나치가 그의 소유물을 빼앗고 그의 몸을 맘대로 짓밟을 수는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빼앗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살아야 할 이유는 첫째로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나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내가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둘째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살아야 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결혼 1년 차인 아내가 있었다.
다시 만나서 그녀와 사랑을 하려면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과 사랑을 나누려면 나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
오늘도 죽음보다 삶을 택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