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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Oct 17. 2022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를 소개합니다


아프리카 가봉에 슈바이처 박사가 있었듯이 우리나라 대한민국에는 장기려 박사가 있었다.

병약한 아프리카인들을 치료하며 일생을 보낸 슈바이처처럼 장기려 박사는 한반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쏟아부었다.

그는 1911년에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고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이후 일본 나고야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이만큼 공부하고 이만큼 실력을 갖췄다면 호의호식을 누리면서 편안히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힘든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당시에는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가난은 임금님도 해결할 수 없다고들 했다.

하지만 장기려 박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어떻게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였다.

그것이 그가 의사가 된 목적이기도 하였다.




그는 평양 기휼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재직하였고 평양의과대학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서둘러 평양을 떠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장기려 박사는 부산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아픔을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무료 진료기관인 복음병원을 설립하여 그들을 돌보았다.

사실 이 당시에는 그 자신도 굉장히 힘든 시기였다.

급하게 피난길에 오르는 바람에 부인과 자녀들을 북에 두고 혈혈단신으로 떠나온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 조금이라도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그런 노력의 결과, 영세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청십자사회보험조합과 청십자병원을 세울 수도 있었다.

또한 학술적인 연구에도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서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치료비가 없는 환자들을 위해서 자신이 대신 치료비를 지불하기도 하였고 퇴원하는 환자에게 일자리를 구해주기도 하였다.

한번은 수술받은 환자가 치료비가 없어서 퇴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장기려 박사는 그에게 한밤중에 몰래 병원에서 도망치게 하고서는 그 뒷수습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런 소식들이 모여서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돈이 없어도 장기려 박사를 만나기만 하면 수술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장기려 박사에 대한 소문은 해외에도 널리 퍼져서 1979년에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자신의 생명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자신이 이곳에서 선행을 베풀면서 살면 이북에 두고 온 부인과 자녀들에게도 누군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어느 해 설날에 아끼는 제자가 찾아와서 세배를 올렸다.

장기려 박사는 덕담으로 “금년에는 나를 좀 닮아서 살아보게.”라고 하였다.

그 말에 제자는 웃으면서 “선생님을 닮아 살면 바보 되게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기려 박사는 껄껄 웃으며 “그렇지, 나를 닮으면 바보가 되는 거지.

그런데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냐?”하고 웃어넘겼다고 한다.

모두가 제 살길을 찾아 아귀다툼하며 살아갈 때 그는 마치 성자처럼 다른 사람을 살리면서 살았다.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가라며 기꺼이 허리를 숙여주었던 분이시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다면 장기려 박사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을까 상상을 하였다.

1995년 12월 25일,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성탄절에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셨다.

그는 갔지만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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