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대학 신입생일 때였다.
어느 모임이나 그렇듯이 첫 모임 때는 서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때도 그랬다.
학과 친구들끼리도 나는 어디서 왔다는 말을 했고 동아리에서도 그랬다.
신기했다.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지명인데 그곳이 자기 고향이라는 친구들이 있었다.
어느 모임에서나 서울,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한 명씩은 대표로 온 것 갔았다.
거기다가 내가 제주도 대표로 그 모임에 함께 한 것이니까 전국 대표가 다 모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각자 자기 고향 이야기만 한다고 하더라도 날밤을 샐 수 있었다.
아직까지 제주도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친구들은 제주도가 생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나 나오는 자그마한 섬인 줄 아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제주도는 한라산에서 축구공을 차면 바다에 빠지는 작은 섬이 아니라 고등학교만 해도 스무 개가 넘는다는 말을 해 주어야 했다.
친구 중에 자기는 용인 죽전에 산다고 소개한 친구가 있었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용인 자연농원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했던 것 같다.
만약 지금의 시대라면 자연농원을 무슨 시골밥상 같은 식당인 줄 알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내다봤는지 자연농원은 몇 년 후에 지금은 용인에버랜드로 이름을 바꿨다.
어쨌든 자연농원에 가려면 시외버스를 타고 한참이나 갔었다.
주위는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 풍경이었다.
죽전도 그런 곳인 줄 알았다.
실제로 몇 년 후에 죽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제 막 도시 개발을 시작하려는지 여기저기 공사판이었다.
울퉁불퉁한 그 길을 덜컹거리는 버스가 달리고 있었다.
그랬던 용인 죽전이 지금은 내가 사는 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죽전을 지날 때면 내 대학시절의 그 친구는 이곳 어디쯤에서 태어나서 자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 죽전이 굉장히 친하게 다가온다.
내가 이곳에 살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내가 이 일을 하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겠는가?
우리 삶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날마다 일어난다.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 백작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 같았는데 그게 불행의 씨앗이 되리라고 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양반 가문의 부잣집 딸로 자란 최서희가 자기 집 머슴과도 같은 길상이와 결혼하리라고 누가 생각하기나 했겠는가?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박경리는 <토지>에서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에게 인연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조심스러워진다.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사람인데 지금은 천하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기도 하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배나무밭이 즐비했던 압구정동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땅이 되었다.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도 전혀 모른다.
대학에서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면 그 길로 잘 나갈 줄 알았다.
졸업 후에 대학에서 공부한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배울 때 속으로 생각했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고.
그런데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되는 걸 보게 된다.
그러니 오늘 내가 보고 듣는 것이 그것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도 변하고 나를 둘러싼 환경도 변하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도 변한다.
지금은 안 좋게 보이더라도 나중에는 훨씬 좋아질 수 있다. 그렇게 기대를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