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모여서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진다

by 박은석


내 왼손 엄지손가락 밑에는 날카로운 것에 베었던 자국이 길게 나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생긴 사처의 흔적이다.

지금의 우리 아이들은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초등학교 5학년 정도 되면 부모님을 따라 밭에 가서 김매기도 하고 추수도 했다.

부모님은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가 제일 바쁘셨던 것 같다.

보리 추수도 해야 했고 콩도 따야 했다.

일손이 달리는 것은 당연했다.

옆집도 그 옆집도 자기네 밭일하기에 벅찼기 때문이다.

농사일은 일손이 많이 필요한데 한창 바쁠 때는 일손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농사꾼들은 자식을 많이 낳는 게 큰 복이라고 여겼다.

학교에서도 5월 말 6월 초에 한 주간 동안 ‘보리 방학’ 기간을 가졌다.

어차피 학생들이 보리밭에 나가서 일을 하느라 학교에 오기도 힘들 테니까 아예 집안일을 거두는 시간을 가지라고 한 것이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보리 방학은 방학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밭에 나가서 뙤약볕 밑에서 일을 해야 하는 중노동의 시간이니까 반길 리가 없었다.




그해 어느 날에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서 보리밭에 나갔었다.

보리를 베려면 이삭 한 묶음을 왼손에 잡고 이삭을 앞으로 숙이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는 낫으로 이삭의 아랫부분을 쓱싹 훑듯이 베면 된다고 했다.

그 방법대로 밭이랑을 따라서 잘 익은 보리 이삭을 쓱싹쓱싹 베어나갔다.

그런데 순간 딴생각을 했는지 그 날카로운 낫으로 내 엄지손가락 밑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피가 촬촬 흘러나왔다.

피를 보니까 덜컥 겁이 났는지 나는 급하게 오른손으로 그 베인 자리를 누르며 지혈을 했다.

흙 한 주먹을 상처에 붙이기도 했다.

민간요법이어서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피가 나면 흙으로 그 상처 난 부위를 덮으라고 했다.

어쨌든 상처는 깊지 않았다.

지혈도 잘 되었다.

며칠 후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냈다.

낫으로 베인 자국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베인 자리에는 새로운 살이 생겨나서 잘 아물었다.

내가 보여주지 않으면 내 왼손에 낫에 베인 상처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 이후 줄곧 서울이나 경기도의 신도시에 보금자리를 펼치고 꽤 괜찮은 사람인 척 살고 있다.

어느 지방 사람들처럼 심한 사투리를 사용하지도 않고 강한 억양을 사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서울 태생인 줄 안다.

그들은 제주도 출신의 사람들이 다른 지방에서 얼마나 적응력이 강한지 모를 것이다.

경상도에 가면 금방 경상도 사투리를 익혀서 ‘천지 삐까리’를 말하며 다니고, 전라도에 가면 금방 전라도 사투리를 익혀서 ‘거시기’를 연발하면서 다닌다.

나도 그랬다.

서울 태생의 사람인 것처럼 별의별 폼을 다 잡고 다녔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는 내가 정말 서울 사람인 줄 나 자신도 착각하곤 했다.

내가 제주도 출신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은 집에 전화할 때이다.

어머니가 수화기를 집어 드는 순간 내 입에서는 똑 부러지는 서울말이 아니라 투박한 제주도 사투리가 터져 나온다.

그렇다! 나는 제주도 사람이다.




내 출신과는 별개로 내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랐는지 확인하는 순간도 있다.

바로 내가 내 왼손 엄지손가락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길게 낫으로 베인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자국, 그 흔적을 볼 때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래, 나는 제주도 출신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야.’

이런 자기소개는 더 이상 쓰지 않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왼손의 흔적을 볼 때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과거를 기억하게 된다.

그 흔적이 내가 자라온 환경을 알려주고 나라는 사람을 더 자세히 설명해 준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흔적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몸에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에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것은 아직도 여전히 통증이 있는 아픈 상처일 수도 있고, 다 아물어서 더 이상 아무런 통증도 느낄 수 없는 흔적뿐인 상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처들이 모여서 ‘나’라고 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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