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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Nov 12. 2022

단어 하나 차이가 내 삶을 변화시킨다


바람이 분다.

낙엽이 떨어진다.

후두득.

그렇게 떨어지는 낙엽을 ‘낙엽 비’라고 불렀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내 곁에서 한 사람이 갑자기 “와! 낙엽이 눈처럼 떨어진다.”라고 탄성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누군가 내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것 같았다.

낙엽을 눈으로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니까 낙엽이 비를 닮은 게 아니라 눈을 더 많이 닮았다.

비나 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같지만 비는 땅에 떨어지면 흘러가 버린다.

반면에 눈은 떨어진 그 자리에 차곡차곡 쌓인다.

낙엽도 눈처럼, 떨어진 그 자리에 수북이 쌓인다.

그러니 낙엽은 눈을 더 많이 닮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낙엽이 비처럼 떨어진다고만 생각했었다.

‘낙엽 눈’이라는 말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나에게 낙엽은 언제나 비처럼 내렸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낙엽은 항상 비였다.




낙엽이 눈처럼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낙엽이 눈처럼 땅에 쌓이면 폭신폭신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폭신한 낙엽 위에 두 팔을 벌리고 큰 대자로 철퍼덕 드러누우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낙엽이 내 몸을 다사롭게 받아주고 깊은 꿀잠으로 인도할 것 같았다.

낙엽이 눈과 같다는 말을 들으니 이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생각들이 새록새록 생겨났다.

말 한마디가 불러온 파장이었다.

태곳적부터 있어 온 것인데 이제야 그 존재를 느끼고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김춘수 선생은 <꽃>이란 시에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따라오는 변화가 얼마나 큰지 알려주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 구절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이름 한번 불러준 것뿐인데 존재가 달라진 것이다.




14년 전에 1년 200권 책 읽기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3년 정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살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문화와 언어도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이었는데 어느 순간 우리말 표현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말은 분명히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지만 내가 사용하는 어휘들이 굉장히 단순해지고 있었다.

한때는 국어선생을 꿈꿨던 사람인데, 내 한국어 실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영어 좀 한다는 사람이 영문 서적을 번역하면 해석은 된다.

하지만 원어의 그 깊은 의미까지 표현해내지는 못한다.

내 한국어 실력이 딱 그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한국어는 잘 구사하지만 번역서처럼 평범한 어휘의 나열이었다.

더 좋은 표현력을 얻고 싶었다.

더 많은 단어들을 알고 싶었다.

국어사전을 펼쳐서 일일이 찾아볼 수는 없었다.

상황 속에서 찾아야 했다.

그때쯤이었다.

책이 내게로 왔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내게로 왔다>와 같은 표현력들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 나이쯤이었어.

시가 내게로 왔어.” 이 시구에서 어려운 말은 하나도 없다.

다 아는 말이다.

그런데 배열을 살짝 수정했더니 이런 명문장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문장만 달라지는 게 아니었다.

전에는 시를 대하면 읽고 외우려고 했다.

내가 어떻게든 시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시에게 가까이 가게 된 것도 아니다.

내가 간만큼 시는 나에게서 더 멀어져갔다.

하지만 이제는 시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무덤덤한 것처럼 시가 내게로 오도록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낙엽을 비로 보았던 나에게 낙엽을 눈으로도 볼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다.

단어 하나 차이인데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세상이지만 이제부터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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