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도 내가 못마땅할 때가 있다.
계획을 세웠으면 빨리 추진해나가야 하는데 이것저것 재보고 있는 나 자신이 밉다.
별로 이득이 없는 일에는 열심을 내는데 정작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일에는 미적거린다.
브런치에 올린 칼럼만 800편이 넘는다.
주변에서 책을 내라는 얘기를 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출판사에 투고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를 보낸다.
세상이 왜 나를 몰라 줄까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세상에 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다.
남 좋은 일에는 정성을 들여 돌봐주는데 나 자신을 위한 일에는 심드렁하다.
욕심을 좀 내야 하는데 물러 터진 것 같다.
지금 이 나이쯤이면 뭔가 이루어 놓은 일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다.
삼국지를 보면서 유비가 답답하다고 느낀 적이 많은데 내가 꼭 그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유비와 급이 같은 것도 아니다.
내 주관적으로 보면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렇게 평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실속을 차리지 못한다.
가진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남에게는 잘해주려고 한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먹는데도 돌아보면 이렇게 살고 있다.
내 주변에는 잘 나가는 이들도 많다.
큰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옷을 쫙 빼입고 다닌다.
전에는 그런 이들이 부럽지 않았다.
그래 봐야 다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게 부럽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기왕이면 폼나게 살다가 가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괜히 고상한 척해도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궁색한 자기 위안일 뿐이다.
어차피 우리는 물질세계에 태어났기 때문에 물질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사는 것이 훨씬 나은 삶이 될 것이다.
이런 우울한 생각을 하면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 나보다 나이가 대여섯은 많아 보이는 중년의 남성들이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의 한 분이 얼마 전에 고호의 다큐멘터리를 봤다면서 고호에게 태호라는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냐고 친구들에게 물었다.
친구들은 그런 동생이 있었냐고 생전 처음 듣는 듯이 반응을 했다.
그러자 그분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호에게 태호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 동생이 형님인 고호에게 너무나 잘 대했고 고호의 작품도 돈 주고 샀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도 태호 같은 동생이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듣는 내 마음이 애잔했다.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더니 그분은 나를 보면서 고호 동생 태호 생각이 난다고 했다.
나도 정중히 어쩌면 그렇게 잘 아시냐고 맞장구를 쳐 드리고 고흐의 동생은 테오라고 정정해서 알려드렸다.
그에게는 고호이든 고흐이든, 태호이든 테오이든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늦깎이 화가가 된 형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한 동생이 있었다는 것이면 충분했다.
고흐의 그림을 돈 주고 산 사람은 테오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고흐의 인생을 실패작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대단한 인생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인생이 성공한 인생인지 내가 판가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가 아는가?
30년 후에 고흐처럼 갑자기 유명세를 타게 될지.
평생을 비천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위대한 인생으로 추앙받을 수 있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까 우울한 연민은 사라지고 나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