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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Feb 22. 2023

남고 여자 담임의 언어(바르게 쓰자, 우리말)

만화 <동사의 맛>을 읽고

고1  담임교사를 하게 되면  학기 초  학부모님 상담이  많다. 고1이 된 우리 아이의 희망찬 기대감과 동시에  입시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서 많은 학부모님들이 우리 아이의  새 담임선생님을 보러 오신다. 내 경험상 처음 상담 오는 학부모님은 진학 상담보다는 새 담임이 누군가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하다.


학기 초엔 나도 복장에 신경을 많이 쓴다. 학부모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우리 아이의  새 담임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안심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ㅡ학기 초 첫 상담의 훈이 어머니 :  어머, 선생님 안녕하세요~ 호호

(밝지만 다소 긴장한 웃음)


ㅡ이자까야 선생 :  안녕하세요~  훈이 어머님~

(내 목소리는 원래 저음인데 이때만은 노래하는 마음으로 '솔'에서 '라' 영역대로 인사한다)


이렇게 시작된 인사로 차차 안정된 상담으로 진행되어 간다. 조금 전보다 훈이 어머님과  어색함이 많이 사라졌다. 이야기를 나누나 보니  여러 가지 사담도 오고 간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담임교사라는 본분을 잊지 않고  학부모님께 예의를 갖춰 바른말, 고운 말을 쓰려 노력한다.


한참 상담 중 우리 반 반장아이가 날 찾으러 교무실로  내려왔다.


ㅡ반장 :  선생님~  교탁에 두고 가신 출석부가  사라졌어요!


반장의 말에 나는 학부모님과 나누던 상담을 잠시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ㅡ (원래의 저음과 걸출한 목소리로) 출석부가 없어졌다고?  지난 시간에 교탁에 출석부 있었는데?  어느 새끼가  뽀려갔나?


아뿔싸!  하던 말을 멈추고 나는  얼른 학부모님의 안색을 살핀다. 훈이 어머니의 미소는 "어느 새끼가  뽀려갔나?"라는 나의 대사 파트에서 살짝 당황하신 듯하다.


방금 전까지 바른말 고운 말을 구사하던 담임이었는데 교양 있는 담임 이미지 만들기는 실패.


새 학기, 새담임, 깔끔한 정장차림의 여자 영어 담임선생님.

하지만  '새끼'와 '뽀려갔나'라는 키워드 두 개에 내 이미지는 와자작. 매일 남학생들과 생활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용하는 어휘가 딱 고등학상 남학생 수준이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반사적으로 내입에서도  "그 여자 예쁘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상담하던 중  우리 반 부반장한테 누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의 질문은 "너희 누나 예쁘냐?"였다.


또는  짜증 나면 "돗나 짜증 나!"(ㄷ을 ㅈ으로 바꾸어 읽어보시길) 이런 비속어가 아무 생각 없이 툭툭 튀어나온다.


말이란 게 환경에서 이렇게 쉽게 스며든다.


그래도 말을 글로 쓰면 자기 검열을 통해  불순물을 거르듯 수돗물처럼 정화된 표현을 쓸 수 있다. 그런데  대화는 하다 보면  방심하는 순간 비속어와 남학생들이 많이 쓰는 욕설이 툭툭 튀어나온다.  


말(특히 구어체)이라는 속성에는 그 사람의 평소 생활, 자주 만나는 연령대, 환경 등이 스며들어있다. 나는  순간 선생님이 아니라 '나이 많은 남고생'이 되어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너희도 열심히 하면 탑티어가 될 수 있어! 보스 스테이지로 레고레고!" 이런 말들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다.  생각해 보니 내 앞자리 여자 담임선생님도 나와 비슷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우리말과 게임용어와 신조어의 믹스 대환장 파티다. 역시 아이들과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나 보다.


선생님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끼리 통용되는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해 주면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을  이해한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마음의 문을 빨리 여는 장점도 있다. 전문용어로 '라포(rapport) 형성이 잘되었다'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언어를 어색하게 잘 못 썼다간 옛날사람으로 치부되어 오히려 아이들어색한 장벽만 더 생긴다)


ㅡ라포(Rapport)ㅡ


그럼에도 아이들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올바른 언어를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리고 내가 무심코 쓰는 말, 당연하게 이런 뜻일 거라고 생각했던 어휘가 전혀 다른 의미였다는 걸 종종 깨달을 때가 있다.


그래서 만화 '동사의 맛'이라는 책을 읽었다. 만화로 되어 있어 한 권 읽는데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희뜩거리다''희번덕거리다' 등의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의 단어들과 그 예를 알게 되었다. 책 한 권에 비해 어휘 관련 정보가  많지 않아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내돈내산'이라 좀 더 많이 배우고 싶었나 보다) 이 책을 통해 하나 느낀 점이 있다. 이제부턴 국어사전을 자주 찾아보자라는 결심!

ㅡ'만화 동사의 맛' 중에서ㅡ


영어교사라 그런지 영어사전은 마르고 닳도록 봤던 것 같다.

어휘공부하면서 영어사전을 씹어먹진 못했어도 사전이 너덜너덜 해 지도록 공부했다.


런데 우리나라사람인 나는 정작 국어사전 보기를 등한시했던 것 같다. 원래 가장 가깝고 소중한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등한시하나 보다. 이제부턴 '국어사전도 열심히 보는 영어교사'가 되어야겠다.

국어사전이 새 책처럼 깨끗하다. 이제 국어 사전도 영어사전처럼 많이 펼쳐봐야겠다.

내가 읽은 동사의 맛이라는 책은 만화책이다. 이 책은 한 단어라도 올바른 뜻과 사용법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많이  아쉬운 점은 설명하는 어휘의  종류가 적고 만화 내용이 다소 어둡다.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오는데 캐릭터와 상황이 우울하다. 나처럼 현재 우울증을 겪고있는 환자가 읽기엔...음..노코멘트하겠다)  만화책이면  이왕이면 밝고 웃긴 내용으로 이야기를 풀어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다음번엔 아예  원작 ' <동사의 맛>,김정선'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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