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친척, 그리고 천적

그들은 친척인가 천적인가?

by 이자까야

병 때문에 고향에 못 내려간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외할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진 명절 때마다 친척들이 할머님 댁에 한데 모이곤했다. 나는 그때가 좋기도 했고, 싫기도 했다.


명절에는 친척 어른분들께 용돈 받는 즐거움이 있었다. 아니, 어린 내겐 큰 기쁨이었다. 외할머니 밑에서 부모님 없이 컸던 나는 평소엔 용돈을 받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 년에 구정과 추석 두 번은 비상금이 생기는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 때 유독 만나기 싫은 친척 한 분이 있었다.


내 사촌 형제 자매들의 나이 차이는 거기서 고만고만하다. 나는 중간 연령대에 해당한다. 내 위로 사촌 오빠, 사촌 언니 2명, 그리고 나. 내 밑으론 다시 사촌동생들 6명.


사촌 형제 자매들끼리는 명절 때 모이면 왁자지껄 윷놀이도 하고 블루마블 게임도 했다. 명절은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수다도 떨며 놀 수 있는 즐거운 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사촌들과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그런 즐거움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친척 어른 중 한 분이 유독 우리들을 '성적, 키, 외모 등의 종목'으로 분류하여 랭킹을 매겼다. 특히 나에 대해선 조목조목 따지고 드셨다.


"너 키가 많이 컸네~? 키가 몇이니? 165는 되니? 여자애 허벅지가 왜 이리 두꺼워~ 운동하니?"


"너 이번 기말고사는 반에서 몇 등했니?"


"윤정이와 현정이는 이쁘게 생겼는데 넌..."

(즉 나는 그 중에서 제일 못생겼다는 뜻이었다. 제길...)


그 친척분의 자녀들과 나는 연년생이었다.


학교 수업이 없는 즐거운 명절에 거의 반 년만에 나타나서는 왜 그런 질문들만 해대시는지...먹었던 음식이 체할것 같았다.


친척분들 중에서 매우 경제적으로 부유한 그 분은 당신의 아이들에게 엄청난 사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와 둘이 살며 매일 뛰어놀기만 하던 내가 당신의 자녀들 보다 높은 성적을 받으면 용납이 안된다고 생각하셨나보다.


몇 년 전에 학교에서 밀린 업무에 한창 정신 없이 일하고 있을 때 였다. 사촌 언니가 내게 "너 양악수술했냐"며 전화를 한것이다. 뜬금 없이 양악수술이라니?


이 어의 없는 질문에 내가 반문을 했더니 사촌언니는 친척분이 내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선 내가 턱을 깎는 수술을 했다며 친척들에게 동네방네 이야기하셨단다.


아...그 카톡 프로필 사진! 그 사진은 적절한 사진 각도와 적절한 표정의 콜라보로 수 십장을 찍어 겨우 한 장 건진 결과물이었다. 왜 다들 그렇지 않으가? 이왕이면 잘 나온 사진을 카톡 프사에 올리고 싶은게 당연한 사람 심리지, 누가 굳이 못생기게 나온 사진을 남들 보라고 올리겠는가!


카톡 프사에 업로드 한 나의 사진 한 장과 친척분의 유언비어로 인해 나는 친척들 사이에서 한 동안 "양악수술을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시 명절이 되어 모든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내 얼굴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그제서야 나의 양악수술 루머를 종식 시킬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내가 교사가 된 점(사촌 동생은 교사임용이 다소 늦게 되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브랜드 등으로 계속 날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친척분의 조카다. 그리고 그 분의 자녀들과는 연년생이다. 자식뻘 조카인 내가 그 분께 무슨 대역죄를 지었길래 아동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런 홀대 아닌 홀대를 받아야만 했는지 이제는 따져 묻고싶다.


이래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성공 사례를 들으면 칭찬하고 선망하기도 한다. 그런데 같은 혈육의 성공은 왜 배가 아플까? 축하해주지 않아도 되니 침은 뱉지 말자.


어릴 때 부터 쌓인 서운함이 누적되고 산처럼 쌓여서 지금은 더 이상 그 분을 자의로 만나지는 않는다.


"우린 가족 아니니~, 가족 끼리 그런 말도 못 하니?!" 라는 말 속에는 남한테도 해서는 안 될 '일종의 폭력'에 해당되는 행태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수용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명절엔 가족들을 만나러 전국 곳곳에서 다들 힘들게 고향으로 모인다. 바쁜 시대에 힘들게 모인 만큼 친족들 끼리 서로 좋은 추억을 남기고 헤어지기도 아까운 시간이다. 친척, 그리고 어른이라는 자격으로 아이들에게 마음에 상처되는 말은 하지 말자. 앞으론 나도 나의 어린 조카들에게 언행을 더욱 조심해야겠다.


말이 나온김에 듣기 싫은 명절 금기어들을 몇 개 정리해 본다.


-유아~중학교 시기 : 키는 좀 컸니?

-특히 여자 아이들에게 : 너 살 좀 빼야되겠다~
-고등학교 때 : 너 성적은 몇 등급이니?

-고3 때 : 대학은 어디 붙었니?

-대학생 때 : 취직은 해야지?

-취업 후 : 애인은 있니?

-직장 생활 중: 연봉은 얼마니?

-20대 중반부터: 이제 결혼해야지?

-결혼 후 : 애는 언제 나을거니?

-첫 아이 출산 후 : 애는 하나 더 낳아야 하지 않겠니? 애 하나는 외롭다~

-30대 중반 : 집은 샀니?

-자가 구매 후 : 집은 몇 평이니? 값은 좀 올랐니?


도와줄 생각도 없으면서 이 지긋지긋한 네버엔딩 민폐 질문은 제발 없어졌으면 좋겠다. '친척'이 내편은 못 되어도 '천적'이 되면 안되지 않을까?




명절때 마다 괴롭힘 아닌 괴롭힘을 당한 그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그 때의 그 불쾌했던 언행들을 고스란히 기억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처럼.


마음같아선 나도 무례한 질문에 바락바락 대들고 싶을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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