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천덕꾸러기에다 바보였던 그 아이는 서울에 있는 사범대에 들어갔고, 그리고 교사가 되었다. 당신께서 평생 한글을 몰라 한이 많았던 나의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나는 공부는 꼭 해야 된다고 이야기하셨다.
내가 교사가 되고 난 후 할머니는 동네방네 우리 손녀가선생님이 되었다며 자랑을 하셨다. 자주 가는 쌀집 아줌마에게도, 슈퍼마켓 아저씨에게도 자랑하셨다. 그리고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에게도 자랑하셨다. 어리둥절하던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의 표정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리곤 얼마 가지 않아 할머니는 그 모든 기억을 잃었다.
"니 누꼬?"
요양원 침대에서 나를 보며 할머니께서 처음 하신 말이었다. 탁해진 눈동자로 내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셨다.
"할머니~ 이 아가씨는 할머니 손녀 아입니까?"
요양원 돌보미분께서 할머니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니....호진이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는 나의 본명을 말했다.
(나의 아명은 효진이다. 새벽 '효'자에 진실될 '진'자라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외삼촌이 술에 취한 채 대충 지어준 이름이라고 나중에 알았다)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자녀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빠르게 잃어갔다. 오직 기억하는 존재는 나 하나뿐이었다.
알츠하이머.
책에서 보던 그 단어를 나의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직접 알게 되었다.
푸세식 똥통에 빠진 나를 한 손으로 번쩍 건져 올려 살려주신 토르 같던 나의 할머니. 빈 공터에 온갖 채소를 키워 5일장 마다 팔아서 먹성 좋던 나를 배 곪지 않게 키우셨던 할머니. 내가 동네방네 사고 치고 다녀도 나의 든든한 피난처이자 안식처는 할머니였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할머니의 든든한 등 뒤에 숨으면 나는 아무 문제 없었다.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로 진단받은 후 급속도로 근육이 빠져나갔다. 나는 내가 아는 한 나의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센 줄 알았다. 팔, 다리도 나보다 길고, 뼈대도 컸다. 평생의 육체노동으로 인해 관절 마디마디가 매우 단단하고 굵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망치 없는 토르 같았다.
내가 자주 사고를 치고 다니면 할머니는 쿨하게 봐주신 적이 많았지만 진짜 화가 나면 나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투포환 던지듯 멀리 던져버리셨다. (나중에 나는 할머니가 혹시 유도를 배운 게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했다. 어쨌든 그 결과 나도 낙법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
나의 할머니는 나에게 있어 거인이었고,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따뜻하고 포근한 존재였다.
교사가 된 이후 내 눈앞엔 전혀 다른 할머니가 있었다.
그 할머니는 대소변도 혼자 하지 못해서 기저귀를 차야했고, 잠을 잘 때는 손 발을 침대에 묶여서 자야만했다. (병원에선 낮에는 할머니들을 온돌바닥에서 자유롭게 쉬게 하지만 잠잘 땐 침대에서 낙상 위험이 있고, 이미 주무시다가 다리뼈가 부러진 적이 있어서 그래야 한다고 했다)
침대에 팔다리가 묶여서 자는 할머니 모습을 나는 차마 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병원 침대에 누워 계시다 몇 년 뒤 돌아가셨다.
학교에서 한창 수업하던중 갑자기 할머니 임종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어떻게 부산까지 내려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십여 년은 건강하고 생활력이 강했던 할머니,
그리고 나머지 십여 년은 기억을 잃어가고 결국 모든 걸 잊어버린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알츠하이머 발병률이 85세 기준으로 40퍼센트가 넘는다고 한다. 암보다도 높은 확률이다. 알츠하이머는 이유도, 치료법도 아직 없다고 한다.
나는 왜 할머니가 언젠가는 알츠하이머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걸 한 번도 생각 못 해 본 걸까?
서울에서 나 혼자 공부하고 살아가기 바빠서?
지금생각해 보니 내가 철이 없었다고 하기엔 나는 너무 이기적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60후반의 할머니는 이미 늙어 있었다. 어이없게도 나는 나의 할머니만은 나이 든 모습 그대로 나와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도 할머니께 많이 죄송하다.
어르신들 하시는 말처럼 할머니 건강하실 때 살아생전 맛있는 것도 더 사드리고, 할머니가 유난히 좋아하시던 분홍색 립스틱도 더 많이 사드릴걸 그랬다.
내가 아프고, 극한의 상황까지 갔을 때마다 할머니가 꿈속에서 나온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어도 내가 눈에 밟혀 떠나지 못하시는 것 같아 더 죄송하다.
나는 토르 같던 천하장사 멋진 할머니의 모습도, 치매에 모든 것을 잃은 할머니의 모습도 사랑한다.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