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원서를 읽고 있는 엄친딸

우린 모두 사랑하는 아이를 키우는 중입니다.

by 온져니

한 친구가 중국으로 이민 가기 일주일 전,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여 조촐한 환송회를 가졌다. 이렇게 모두 모인건 10년 만인 듯했다. 쉽게 모일 수 없었던 10년을 각자 보냈다. 누군가가 떠난다거나, 우리에게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그런 큰 이벤트가 있지 않은 이상 '가족'에 충실했던 지난 시간이었다.


스무 살 때부터 서른까지의 10년은 나를 찾는데 시간을 보냈다면, 이후 10년은 나와 똑같이 닮아가는 아이의 삶을 통해 나를 찾는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후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우린 모였을 거다. 격세지감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훌쩍 커 버린 친구의 아이를 보니 세월의 빠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친구들이 모인 곳으로 들어서는데....


똘똘한 눈매의 여자아이가 두꺼운 영어원서를 읽고 있었다. 패드나 핸드폰이 아닌 책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움과 부러움을 자아냈을 텐데 무려 영어로 된 원서라니. 이제 3학년이 되는 아이였다.


"뭐지? 왜지? 어떻게 이렇지?“


생애 처음 보는 장면이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엄마 친구 모임에 영어책을 집어 들고 나선 아이,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책이 재밌어서 읽는 아이. 적어도 아직 내 주변엔 없었다. 아마 아이를 통해 알게 된 부모의 모임이라면 이런 말을 불쑥 못 내뱉었을지 모른다. 막역했던 고등학교 친구니까, 직접 만나지 못했더라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그 스토리는 너무 잘 아니까 참한 친구 딸내미를 보니 불현듯 다음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아까워서 시집 못 보내겠다 야. 처음 본 이모가 그런데 너희 엄마 아빤 오죽하겠나 싶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이 퍼포먼스는 얼마를 받고 하기로 한 거야?"라며 부러움 섞인 말도 했다.

직접 만난 엄친딸은 정말 '완벽'했고, 지상계에 없을 것 같은 어나더레벨의 아이처럼 보였다.


친구는 "집에 가면 안 저래~ 밖에서만 모범생이야"라며 겸손의 말을 내비쳤지만, 아이가 얼마나 엄마의 사랑을 받았는지, 또 착실히 자기 몫을 해내고 있을지는 보이는 태도 하나하나에 묻어났다. 내 딸도 어디 가서 부족하다면 서러울 정도라 생각했는데 다른 레벨이라 느껴진 건 비단 '영어를 잘한다' 뿐이 아니었다. 본디 가진 기질과 친구의 면면을 봤을 때 이대로만 커준다면 ‘자식농사 제대로다’란 말을 들을 것이 분명했다.


오늘 새 학기가 시작됐다. 내 딸아이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 친구가 1교시부터 4교시까지 교실을 마구 돌아다니며 수업을 방해했고, 선생님은 대체로 힘들어하셨고 급기야 급식실에서 아이가 너무 울어 밥 한 숟가락도 뜨지 못한 채 엄마가 달려와 데리고 갔다는 말을 바쁘게 전했다.


들으면서도 앞으로 1년이 조금은 걱정됐고, 그 아이의 엄마는 오죽 속상했을까 이해하고 싶기도 했다. 세상엔 엄친딸 같은 아이만 있는 게 아니니 다양성을 인정해야지, 서로 다독이며 함께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겠지 했다.


우리는 부모가 되어 저마다의 방식으로 진짜 사랑을 줌에도 아이는 사회가 생각하는 '엄친딸'의 모습으로 크지 않는다. 학습도, 태도도, 인성도, 다방면으로 뛰어난 아이들이 있는 반면 세심하게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는 아이도 있다. 아이는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그림대로 크지 않을 확률이 높다. 오히려 내가 너무 싫어하는 내 모습을 그대로 닮은 채 커간다. 그럼에도 결국은 '사랑'이란 걸 우리는 안다.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해내는 아이로 성장시키기 위해 오늘도 잰걸음을 걸으며 말이다.


아이의 마음으로 들어갈 입구만 제대로 찾는다면 절반은 성공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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