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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들 Mar 15. 2024

남은 한 달

가슴이 뛰었다.

 휴직이 한 달 남았다. 1년이 끝나갔다. 가슴이 뛰었다. 설렘은 아니었다. 스트레스였다. 회사 다닐 때 안 좋은 추억이 떠올랐다.


 보통 시간이 지나면 좋은 기억만 남았다. 회사 안 간지 1년 가까이 됐다. 아직 마음속 앙금이 남아 있었다. 엉겨 붙어 잘 안 떨어졌다. 곧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틈만 나면 생각했다. 휴직 후 어떻게 살 지 궁리했다.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회사와 계속 친해지는 방법이 있었다. 회사와 멀어질 수도 있었다. 아이를 계속 돌볼 계획도 있었다.


 내가 고를 수 있다니 어색했다. 이 낯섦이 잘못됐다. 내 인생 내가 선택할 수 있었다. 회사 안에서 필요 이상으로 쭈그러졌다. 그곳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못했다. 사고가 고립됐다. 한동안 밖에 있으니 구겨진 자아가 펴졌다. 생각도 열렸다.


 회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러 가지로 따지고 따졌다. 백 프로 좋은 방법은 없었다. 모두 장단점이 있었다. 내가 좋은 일만 할 수 없었다. 포기할 건 포기해야 했다. 그중 가장 나은 선택을 했다.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복귀 여부를 물었다. 결론은 이미 낸 시점이었다. 복귀한다고 답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 긴 시간과 다르게 대화는 금방 끝났다.


 회사는 원 부서에 자리를 마련해 줬다. 공석에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채울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기다려줬다. 드문 일이었다. 배려에 감사했다. 갈 곳이 없었으면 불안했을 것이다. 습관적인 근심이 올라왔을 것이다. 걱정 떨치는데 도움을 줬다.


 복귀 신청서를 보냈다. 빨리 처리했다. 익일특급으로 했다. 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어느 때보다 소중했다. 그 순간에 좋은 것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잘 도착했을 것이다. 의심하지 않았다. 보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며칠 뒤 불현듯 내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했다. 우체국 사이트에 등기번호를 넣고 조회했다. 패문부재 2회로 우체국에 보관 중이었다. 곧 반송 예정이었다. 다시 심장이 뛰었다.


 생각하지 못한 결과였다. 당황했다. 건물 1층에서 통제한다는 걸 깜빡했다. 출입증이 없으면 못 들어갔다. 우편물도 막혔다. 봉투에 연락처만 있었어도 전달됐다. 생각 없이 주소와 이름만 적어서 보냈다. 난 완전히 감을 잃었다.


 다시 보냈다. 이번에도 바로 움직였다. 처음 보냈을 때와 달랐다. 늦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도착하는 순간까지 신경 썼다. 이번에도 다음 날 도착하게 보냈다. 연락처도 잊지 않았다. 패문부재 시 이번에는 건물 우편함에 놔두게 했다. 배달하는 분께 따로 연락드렸다.


 빨리 도착했다. 잘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원래 이런 스타일로 일했다. 걱정이 많아 이중, 삼중으로 확인했다. 문제가 있을까 봐 늘 불안에 떨었다.


 오랜만에 익숙한 스트레스를 경험했다. 긴장감이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했다. 해결되니 천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안도감이 찾아왔다. 회사에서 일 하나 끝낸 느낌이었다.


 점점 현실을 받아들였다. 마음속 동요가 사라져 갔다. 우편물로 한번 연습했다. 서류에 도장 찍어 무를 수 없었다. 기분이 더 이상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았다. 준비가 어느 정도 다 됐다.


 이제 남은 날을 손에 꼽게 됐다. 어디 가지 않았다. 집에만 있었다. 심심하게 보냈다. 따분함을 누렸다. 아이는 방학이었다. 나도 다름없었다. 난 마지막 방학을 보냈다. 우리는 지루함을 달랠 방법을 찾았다. 같이 하기도 했다. 각자 하기도 했다. 어디 가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내일이면 회사 가야 했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보다 보니 눈이 감겼다. 잠을 청했다. 막상 자려하니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자리 잡은 잡념만큼 잠은 빠져나가 버렸다. 취침을 포기했다. 눈만 감았다. 불필요한 생각이 빠지길 기다렸다.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나갈 것이었다.


 감은 두 눈앞에 1년이 펼쳐졌다. 슬라이드 보듯 한 장 한 장씩 넘어갔다. 천천히 음미했다. 많은 장면이 떠올랐다. 눈물은 아꼈다. 기억하기 바빴다. 글로 남긴 에피소드는 뚜렷했다. 그 외는 흐릿했다. 기록은 강력했다. 빛바래지 않고 선명하게 남겼다. 더 쓸 걸 그랬다. 지워진 날들이 아까웠다.


 사진도 많이 찍었다. 사진은 그 순간을 정확하게 남겼다. 감정까지 담기는 부족했다. 글은 둘 다 저장했다. 어떤 심정이었는지 고스란히 남았다. 무슨 생각으로 살았는지 구체적이었다. 고르고 고른 단어로 꾹꾹 눌러져 있었다. 내 한계로 묘사는 허술했다. 그래도 글로 남기길 잘했다.


 뿌듯함 뒤로 기억이 안 났다. 드디어 잠이 들었다. 눈뜨니 겨우 몇 시간밖에 안 지났다. 떠났던 생각이 다시 들어왔다. 잠이 또 오지 않았다. 출근까지 시간이 남았다. 기도와 운동으로 털어내기로 했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루를 일찍 시작했다. 긴장한 덕분인지 피곤하지 않았다. 불안이 이번에는 쓸만했다.


 나와 아이는 함께 집을 나왔다.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둘 다 새로운 출발이었다. 난 1년 만에 회사로 향했다. 아이는 새 학년으로 학교에 갔다. 떨어진 위치에서 각자 잘할 것이다. 아이 새 교실 위치가 어딘지 같이 확인 못했다. 회사 가는 길에 갑자기 생각났다. 나중에 들어보니 잘 찾아갔다고 했다. 나도 길 잃지 않고 잘 도착했었다.


 나중에 아이 이야기를 또 열어 볼 것이다. 기분이 묘할 것이다. 현재와 상반된 판타지이다. 이때가 그리울 것이다. 당시에는 보통 일상이었다. 나중에는 다시 안 올 꿈이 된다. 아이를 자전거 태우고 가는 길이 눈에 선하다. 그때는 빨리 가기 바빴다. 좀 천천히 갈 걸 그랬다.


 아이도 이 글을 봤으면 좋겠다. 보고 피식 웃었으면 한다. 이런 사소한 걸로 힘을 얻는다. 난 그랬다. 앞으로 나와 밀착하지 않는다. 대부분 시간을 떨어져 있는다. 늦지 않게 학교에 잘 갔으면 한다. 혼자서도 학원을 잘 다녔으면 한다. 중간중간 시계를 잘 봤으면 한다. 걷는 게 힘들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처럼 횡단보도를 잘 건넜으면 한다. 하루를 잘 보냈으면 한다. 그러다가 가끔 이 1년을 추억했으면 좋겠다.


 아이에게 감사하다. 내 인생 최고의 1년을 선사해 줬다.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소중하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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