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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원 Jun 26. 2024

LG 켈리, 8이닝 퍼펙트보다 값진 것은

완봉승이 떠올린 완투패


어제는 취재원 저녁 자리가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오전에 미루자는 연락을 받았다. 갑자기 생긴 저녁 공백에 곧바로 LG 경기 취소표가 있는지 찾아봤다. 평일인지라 퇴근하고 잠실까지 가면 빨라야 4이닝부터 볼 수 있었지만, 뒤늦게라도 직관하고 싶었다. 요 며칠 머리가 복잡하고 답답한 일도 있던 탓에 바람도 좀 쐬고 싶었다.


예매에 성공했다 금세 취소해야 했던 자리

금요일도 아닌 화요일 저녁 경기였는데도 외야 말곤 좌석이 거의 없어서 정말이지 놀라웠다. 결국 다섯 번 예매창을 들여다본 끝에 네이비석 두 자리를 운 좋게 예매했다. 연석은 아니었지만 둘 다 통로 쪽으로 괜찮은 자리를 잡아 신났다. 남편은 야근이라 시간 되는 지인이 있다면 함께, 아니라면 혼자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허나 모든 일이 마음처럼 될 수 없듯, 애석하게도 오후에 일이 생겼다. 저녁 늦게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라 아깝지만 표를 취소했다. 오후 4시 전에 취소하면 수수료가 없다. 그렇게 집관한 경기에서 선발투수 케이시 켈리가 완봉승을 했다.


7이닝부터였나, 화면엔 아예 '켈리 퍼펙트 진행 중'이란 말을 띄워뒀다. 야구에서 퍼펙트게임은 투수가 안타, 볼넷, 몸에 맞는 공, 실책으로 인한 출루를 포함해 그 어떤 이유로든 단 한 명의 주자도 허용하지 않고 퍼펙트하게 끝낸 경기를 의미한다. 아웃카운트 하나씩 잡을 때마다 긴장됐다. 43년 역사상 KBO 1군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대기록이 쓰일 순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9회 초 선두타자의 안타로 이번에도 그 '꿈의 기록'은 달성되지 못했다.



퍼펙트 투구는 깨졌지만 완벽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 중계 화면으론 못 봤지만, 기사를 보니 안타를 치고 출루한 삼성 윤정빈 선수를 향해 켈리 선수가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는데 이것마저 완벽했다. 이어서 병살타, 뜬 공으로 27명의 타자만을 상대한 게임을 마무리했다.


2019년 LG에 입단해 올해로 벌써 여섯 시즌을 보내고 있는 켈리 선수의 구단과 팬에 대한 로열티는 이미 유명하다. 경기력뿐만 아니라 마인드까지 좋으니 팬들 입장에선 이보다 더 고마운 외국인 선수가 없다.


어제 인터뷰에서도 팀에 대한 애틋함과 애정이 보였다. 켈리는 팬들이 여전히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며, 항상 응원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번 시즌에 힘들었다는 말도 했는데, 실제 켈리는 한동안 퇴출설이 돌기도 했다. LG의 단장이 대체 외국인 선수를 찾아 미국으로 갔다는 기사도 많이 나왔다.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지만, 이날 경기 전까진 15경기 3승 평균자책점 5.13으로 부진했다.


화면 출처_SBS Sports


어제 켈리의 완봉승은 지난 13일 완투패를 떠올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했고 당시 켈리는 혼자 끝까지 책임지며 8이닝 완투패 패전 투수가 됐다. 당시 LG는 선발 투수 두 명이 부상으로 이탈해 대체 선발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는데 자연스레 불펜의 부담이 많아져 경기 운영에 걱정이 커진 상황이었다. 경기 중 결국 점수 차가 벌어지며 필승조를 투입하기도 힘들고 남은 투수들을 활용하기엔 다른 경기도 고려해야 했다. 결국 선발 켈리가 끝까지 공을 던지며 그 고민들을 지워냈다. 무조건 다 이기는 게 제일 중요한 줄 알았던 진정한 야알못 시절엔 이해 못 했을 상황이지만, 이젠 이게 얼마나 값진 패배인 지 안다.


시즌은 길고 언제나 어제 같을 순 없다. 크게 이기는 날이 있으면 크게 지는 날도 당연히 있다. 그냥 야구 경험치 부족한 초보자로서 오래 기억할 행복이 하나 추가 돼 기쁘다. 야구가 위로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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