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폭염의 기세가 남아있지만 절기는 곧 가을이 온다고 예고하고 있다. 가을은 야구팬에게 간절한 계절이다. 이름만은 낭만적인 '가을야구'는 10월 중순에 시작하는 KBO 포스트시즌을 말한다. 10개 팀 중 정규리그 상위 5위권에 든 팀에게만 허락된다. 가을 야구에 가느냐 못 가느냐, 그 기로에서 팬들은 환호하고 절망한다. 절반은 떨어지는 꽤 잔인한 싸움이다.
올해도 어느덧 110경기를 넘어섰다. 정규 시즌이 총 144경기이니 벌써 4분의 3은 지난 셈인데 여전히 순위 싸움은 대혼란에 빠져 있다. 어느 팀이든 몇 번 연패했다간 순위가 쉽게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다. 올해는 특히 KBO 인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기에 가을을 앞둔 요즘 야구판 자체가 활활 타오르는 듯하다. 최근 야구 기사 제목엔 이미 '가을야구'가 붙은 경우가 많아졌다. 가을야구 희망이 보인다거나, 멀어지고 있다거나, 누가 가을에 강하다는 식의 내용이다.
그러니까 오랜 팬들은 매년 가을 직전에 이런 설렘과 긴장을 느껴왔겠구나. 2년 차 초보 팬으로서 또 신기함을 느낀다. 내 인생 30여 년 난 뭐 하고 살았더랬나. 어떻게 야구 없이 지내왔는가.
네이버 스포츠면 기사 다수 제목에 '가을야구'가 붙었다
가을야구의 시간이 다가오는 걸 보고 있자니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만년 꼴찌 팀 '드림즈'의 백승수(남궁민) 단장이 다른 팀으로부터 한 선수를 데려오려 한다. 그런데 그 선수는 여름엔 타율이 떨어지고 가을에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가을야구에 매번 진출하지 못하는 꼴찌팀에게 가을에 힘을 내는 타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니, 상대팀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이때 백승수 단장이 이렇게 말한다.
"이런 말씀드리기 좀 죄송하지만, 올해는 저희가 가을야구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무조건."
내년도 내후년도 아닌 당장 올해 우승을 목표로 하는 팀에겐 '윈나우(Win-now : 즉시전력감을 영입해 당장의 성적 향상을 목표로 함)' 전략이 필요했고 결국 유망주를 내보내고 가을에 강한 그 타자를 영입하는 선택을 한다.
가을야구가 뭐길래 이렇게 비장한 표정과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걸까. 뒤늦게 이 드라마를 몰아봤을 땐 지금처럼 야구에 빠진 건 아니었어서 확 와닿진 않았다. 이젠 모든 대사에 마음이 한껏 이입된다. 기약 없는 시즌2를 오늘도 기다리면서.
화면 출처: 유튜브 채널 'SBS Drama'
그렇다면 가을야구엔 어떤 팀이 가장 많이 갔을까. 나무위키가 자세히 알려주길래 읽어봤다. 1위는 29번 진출한 삼성라이온즈다. 10개 팀의 창단 연도가 제각각이니 진출률로 따져봐도 삼성이 70%로 1위다. 그 뒤는 NC다이노스(64%), 두산베어스(61%), SSG랜더스(58%), 키움히어로즈(56%), KIA타이거즈(54%) 순이다.
나머지 4개 팀은 진출률이 50%가 채 안 된다. 2023년 우승팀 LG트윈스도 포함이다. 나처럼 입문 첫 해애 우승을 봐버린 '고점 물린' 팬에겐 자칫하면 가을야구가 어렵지 않은 것 아니냐는 오만이 자리 잡기 쉬운데, 이런 통계를 보면 순식간에 겸허해진다. LG 암흑기 역사를 보면 고개마저 절로 숙여진다. 건방은 곧 죄악이요, 야구도 인생 대하듯 겸손하게 봐야 한다. 설레발은 금기이니 그저 조용히 응원하는 게 답이다.
곧 처서(處暑)가 온다.
여름에 신나게 날아다니는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고 한다. 이제 정말 그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