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억으로 또 희망을 품고
야구를 모르던 시절에도 '9회말 2아웃'이란 말은 들어봤다. 이 간단한 여섯 글자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어딘가 극적이고 간절한 순간을 의미한다는 건 뉘앙스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TV드라마 제목이기도 했다.
야구를 알게 된 지금, 9회말 2아웃 상황은 희망보단 체념에 가깝단 걸 안다. 구체적으로 연상되는 장면은 이렇다. 일단 우리가 홈 팀이니 9회 말에 공격을 하는데, 지고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점수를 내야 하지만 별 소득 없이 이미 아웃카운트만 두 개 올라간 그런 힘 빠지는 순간. 끝을 알면서도 이내 져버릴 기대를 한 줌 안고 경기를 끝까지 보고 있는 그런 오들오들한 감정 같은 것이다.
9회말 2아웃은 야구에서 자주 찾아오지만, 극적인 드라마가 쓰이는 건 아주 소수다. 그런데 중요한 건 쓰이긴 한다는 것이다.
11일 어제, LG트윈스가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박동원의 끝내기 역전타로 NC다이노스를 이겼다. 직전 9회 초엔 LG 내야수의 결정적 실책으로 동점 균형이 깨지며 1-3이 됐다. 이럴 때면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한다. '오늘은 졌다, 진 거다, 괜한 기대하지 말자'.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크게 속상한데 아예 기대를 내려놓으면 덜 속상하니 럭키비키,까지는 아니고 덜 슬프다고 생각하며 뇌를 세뇌한다. 문제는 세뇌는 하면서 두 손은 서로 맞잡고 누구보다 간절한 사람처럼 응원하고 있다는 거다.
열세로 시작한 9회 말 LG 공격, 선두타자가 땅볼에 그치며 더욱더 집중적으로 세뇌하기 시작했다. '지는 경기도 있지, 상대가 잘 한 거지, 연승했잖아.' 하지만 오스틴의 솔로 홈런에 이어 차은우, 아니 문보경 선수의 2루타까지 터졌다. 다음 타선은 삼진과 볼넷. 이제 9회말 2아웃 상황이 됐고 박동원 선수가 기어코 2타점 끝내기안타를 쳤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다분히 진부한 이 말이 가끔 현실이 된다. 초연한 척, 체념한 척 애써 태연하게 경기를 보던 팬들을 기어코 방방 뛰게 만드는 순간이 이따금씩 찾아온다. 승리의 기쁨은 두 배 세 배가 되고, 9회말 영상을 돌려보고 또 돌려본다. 한국시리즈도 아닌데, 거의 매일 열리는 경기 중 하나일 뿐인데 말이다.
이 기억으로, 앞으로 또 다가올 숱하게 많은 9회말에 팬들은 희망을 건다. 그럼 또 대부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쉬워하겠지만, 언젠가 어떤 순간엔 다시 환호하고 감동하며 기억을 하나 적립하게 될 테다. 그럼 또 그 기억으로 여러 날들을 희망으로 채우는 식이다. 하여튼 적당히 좋아할 수 없는 스포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