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1일 수요일 저녁,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와 삼성의 경기를 보고 왔다. 어느덧 올해 22번째 직관이었다. 병원에 갈 일이 있어 오후 반차를 썼는데, 끝나고 얌전히 집에 가는 대신 신나게 야구장에 가는 쪽을 택했다. 취소표로 내야 네이비석 2장까지 구해 한화팬인 친구와 함께 갔다.
야구장에 가기로 마음을 먹은 후론 즐거운 생각뿐이었다. 날씨 걱정은 딱 하나. 예보에 없던 비만 안 오길 바랐다. 걱정이 무색하게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모든 게 순조롭겠거니 했다.
오산이었다.
야구장이 있는 종합운동장역에 내리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정수리 바로 위에 해가 있는 것처럼 이마가 뜨거워졌다. 손등을 대보니 실제로 피부가 뜨거웠다. 오는 지하철에 사람이 꽤 많아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어도 참 후끈하다고 생각하며 왔는데, 밖으로 나온 지 5초 만에 그 온도가 그리워졌다. 무척 시원한 거였다.
평일인데도 좌석이 거의 매진됐다더니, 야구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모든 곳에 길게 줄 서 있었고, 보기만 해도 기운이 쭉쭉 빠졌다. 올해 스무 번 넘게 경기장에 오며 매진 경기도 많았고, 트윈스샵이나 매표소 앞에서 한참을 줄 섰던 날도 있었지만 이날따라 비교할 수 없이 발걸음이 무거웠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날 서울엔 폭염경보가 발효 중이었다. 일 최고 체감온도 35도 이상 상태가 이틀 이상 지속될 걸로 보일 때 기상청이 내린다. 말 그대로 위험한 수준의 더위니까 미리 대비가 필요하다는 경고인 셈이다. 내가 현재 담당하는 6개 출입처 중엔 기상청도 있기에 이미 폭염 기사를 여러 번 썼다. 이렇게 더운 날엔 야외 활동을 자제해야 한다, 온열 질환의 증상엔 어떤 것들이 있다, 특히 이번 여름은 평년보다 기온이 몇 도 더 높다... 등등. 그래도 여전히 폭염은 내게 견딜 만한 거라 생각했나 보다.
오만이었다.
7월 31일 오전 10시에 폭염경보가 내려졌다. (출처: 기상청 날씨누리)
무인매표소에서 종이 티켓을 뽑고, 음식과 음료수를 적당히 사서 입장해 좌석에 앉았다. 이때부터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무거운 가방 탓도 있었다. 이제는 군데군데 닳아버린 내 애착 백팩은 이날도 짐을 한가득 담고 있었고, 가방끈과 옷이 맞닿은 양쪽 어깨와 등은 땀으로 진작에 축축해졌다. 점점 몸에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지러움과 피로감, 두통. 모두 질병관리청의 온열질환 자료에서 본 초기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야구장에 왔고 친구도 내가 제안해 데려왔으니 신체적 피로함을 정신적 만족감으로 이겨내보려 했다. 좀 지나면 괜찮아질 일시적 어지러움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는 더 아파왔고, 야구장에서 이동하는 걸 싫어하지만 중간에 두 번이나 오가며 이온음료를 잔뜩 사마셨다. 얼음 아이스크림을 사와 얼굴에 연신 갖다 대기도 했다. 다행히 경기는 잘 흘러갔다. 선발 투수 손주영 선수는 6이닝 1 실점을 기록했고, 이날 선발 전원 안타까지 달성했다. 타선이 터지며 응원 열기도 더 커졌고, 응원가 메들리까지 펼쳐졌다. 경기 결과는 11대 5 압승.
완벽했지만 내 컨디션만 점점 바닥을 찍고 있었다.
와 신난다, 하늘 예쁘다, 재밌다, 를 외쳤지만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야구장에서 빠져나와 전철을 타러 가는 길에 다시 편의점에 들렀다. 이온음료를 또 사서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마셨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선 표정관리를 이제 안 해도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긴장이 풀리며 증상이 더 심해졌다. 집까진 전철로만 한 시간이 걸리는데 중간에 구토할 것 같이 속이 안 좋아져서 원래 환승해야 하는 역보다 한참 미리 내렸다. 멀리 돌아가야 했지만, 당장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집 앞 전철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집까지 10분 거리를 어떤 정신으로 걸어갔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에스컬레이터가 유독 더 어지러워 손잡이를 꽉 잡고 탄 것만 떠오른다. 집에 도착해선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놀란 남편이 편의점에서 쌍화탕을 사 와 비타민과 함께 먹고 바로 누웠다. 다음날 일찍 출근해야 해 어떻게든 컨디션을 회복해야 했지만 이미 깨달아버렸다. 제대로 더위를 먹어버렸단 것을.
이날 응원수건으로 닦은 땀만 한 바가지였다.
아침에 눈을 떴지만 역시 나아지질 않았다. 이 더운 여름에 온몸이 으슬으슬 추웠고, 머리는 마치 소맥을 수십 잔 마시고 잔 다음날처럼 깨질 것 같았다. 서랍을 뒤져 손에 잡히는 진통제를 두 알 털어 넣고 겨우 출근했다. 꾸역꾸역 버티듯 하루를 보내야 했다. 최악이었다.
야구가 좋고 직관이 좋아 틈만 나면 야구장을 찾았지만, 이번엔 제대로 교훈을 얻었다. 더위를 얕잡아보다간 큰일 날 수 있다. 최근 여러모로 피로가 쌓여있단 걸 스스로 알았으면서도 무시하고 밖을 나선 게 화근이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외면하고 햇볕 아래로 걸어들어간 건 어쩌면 객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8월 2일 오늘(자정이 지나 어제가 됐지만), 울산야구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LG와 롯데의 경기가 폭염으로 취소됐다. 더운 날씨 때문에 경기가 열리지 않은 건 프로야구 출범 42년 역사상 처음이다. 경기 시간은 저녁 6시 30분인데도 열대야가 극성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경기장 그라운드 온도가 복사열 때문에 50도 가까이 찍히기도 했다는데 선수에게도 관중에게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
야구장의 폭염을 온몸으로 느껴보니 분명히 알겠다. '폭염취소', 마땅히 마땅하다. 지당하고 또 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