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즈테페에서 감탄하거나 외로움을 느끼거나

by Neonsky

우준괼 투어를 마치고 시내에 들어오니 이미 어둑어둑 해가 저물었다. 아직 중천에 해가 떠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흑해의 날씨는 쉬이 맑은 태양을 보여주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멀리 흑해를 내다봤지만 꽉 막힌 구름이 햇빛을 틀어쥔 채 뿌연 운무와 특유의 묵빛만을 내보인다. 오늘도 일몰은 글렀으려나. 벌써 4개 도시를 지나왔지만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된 일몰을 보지 못했다. 다시 한번 4월의 흑해 연안은 함시를 찾아먹는 식도락 여행도, 각종 투어를 즐기기에도 적합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다고 이대로 하루를 끝내기에도, 함시 비슷한 생선으로 한 끼를 때우기에도 무용했기에, 억지로 보즈테페 언덕으로 올랐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돌무쉬를 타고 보즈테페로 향한다. 메이단 공원에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고 요금마저 저렴하기 때문이다. 굳이 고생을 해가며 30분 가파른 언덕을 걸어 올라갈 필요도, 복잡한 골목길에서 길을 잃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나는 사서 고생하길 택했다. 승객이 가득 차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는 돌무쉬가 답답해서도 있지만, 나만의 기청제(祈晴祭)랄까? 공을 들여 정상에 오르면 수평선 멀리에서나마 말간 해를 보여줄 것만 같았다. 굽이굽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이름 모를 모스크를 지나 차분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조막만 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차이를 마시는 터키인, 생선 좌판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금세 정상에 닿는다.




흑해 연안도시 트라브존이지만 막상 도심으로 들어오며 탁 트인 바다를 보기 쉽지 않다. 건물 사이사이로 어설픈 바다가 보이긴 하지만 이내 복잡한 도로, 거다란 항만 등에 시선이 뺏기기 일수다. 온전히 트라브존의 전경과 흑해를 눈에 담기 위해 사람들은 보즈테페를 찾는다. 언덕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인 여러 카페에 앉아 차이를 즐기면, 잠시나마 복잡한 일상을 벗어난 착각에 들게 한다. 괜히 이곳이 젊은이들에게 데이트 코스이자 관광객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장소로 사랑받아온 게 아니었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테이블 아래로 시야를 두니 흑해의 차분한 분위기와 제법 어울리는 빨간 지붕 군락이 나타난다. 어느 하나 특별히 튀는 구석이 없어, 차근차근 층위를 이루며 바닷가로 이어진 건물들을 바라보는 맛이 있었다. 이곳 트라브존은 홍차로 유명한 '리제'라는 지명과 인접해 있어 차이 맛이 좋다고 소문났다. 하지만 내키는 대로 네스카페 한잔을 주문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터키나 그리스에선 네스카페가 인스턴트커피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란다. 멋진 전경을 놓고 믹스커피를 들이켜고 있자니 싸구려 커피 따위도 그럭저럭 고급진 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일몰까지 시간이 꽤 남아 있었지만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칙칙한 하늘 아래로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송이에 시선을 뒀지만 나는 더욱더 짙게 구름 낀 하늘만을 바라봤다. 1년을 훌쩍 넘는 시간만에 맞는 첫눈이었다. 스멀스멀 고독감이 밀려와 일몰을 기다리기 힘들어졌다. 나 홀로 여행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외로움과 홀가분함 사이의 양극단을 오가는 시소와 같다. 오늘은 특히 시소가 외로움 쪽으로 크게 기운다.


눈. 눈 때문인가. 지난 1년을 여름만을 쫓아다녔다. 사이클론의 여파가 채 가시지도 않은 호주 다윈에서의 6개월, 봄비인지 겨울비인지 1주일에 4일 이상이 비가 내리고 온종일 흐렸던 퍼스의 초여름. 다시 이곳 터키에서 맞는 눈은 일련의 과정을 건너뛴 어느 한 지점에 불쑥 떨어진 것만 같았다.


나풀나풀 공중을 유영하며 떨이 지는 눈송이가 트라브존의 가장 높은 언덕으로 자유롭게 하강한다. 어쩌다 주변 나뭇가지에 걸려 짧은 자유가 끝이 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언덕으로 무사히 내려와 벅찬 눈물로 땅에 스며든다. 원래의 난, 첫눈을 맞을 때면 소년 다움에 젖었다. 시간표대로 정해놓은, 일련의 과정 중 하나였던 첫눈. 장애물 하나 없는 하늘에서 눈송이가 흩날리면, 사위가 고요해지고 오로지 내 마음만이 들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첫눈은 일몰을 방해하는 기상이변이자, 땅에 녹아 진창을 만드는 불편함, 소년의 흥겨움 대신 낯선 이방인의 고독감이었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면 고독감도 채워진다는 조언이 떠올랐다. 일단 뱃속을 든든히 하면, 만족한 위가 쓸쓸한 감정을 기만해 행복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나. 물론 이런 조언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정이 뱃속의 물리적 요인으로 얼마든지 변한다는 사실을 타당하다 여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어쨌든 언덕을 내려와 맥도널드로 향했다. 터키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나는 햄버거와 케첩 대신 준 마요네즈에 감자튀김을 찍어 먹었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호스텔로 들어왔지만 어디에도 안락함은 없었다. 커다란 열쇠고리가 딸린 적막한 방이었다. 묘하게 촌스러운 커튼 탓인지, 아직은 추운 날씨인데도 난방이 되지 않는 방 때문인지. 다시 한번 완벽한 타인의 장소에 있다는 느낌이었다. 보즈테페에서의 적막함이 내 마음에도 스며든 걸까. 홀로 도시를 떠도는 애처로운 영화 주인공처럼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어두워진 창문 밖으로 호스텔 간판의 불이 들어왔다.

호텔 에페의 간판이 핑크빛 촌스러운 네온으로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달의 궁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마르코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출생의 비밀, 지독한 굶주림,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을 굴곡지게 그린 소설이었다. 극 중 주인공은 극심한 곤궁함에 시달리던 중 창문 너머로 비친 중국집의 네온간판에 취한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네온간판을 바라보며 새 희망과 광기를 얻는 주인공의 모습과 호스텔에 누워 창밖 너머 핑크빛 간판을 응시하는 내 모습을 비교해본다.


소설 속 장면처럼 딱히 극한의 상황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하나 불안해하고 외로워할 이유가 없었다. 새로운 환경이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와 그 이면에 자리 잡은 설익은 감정들을 추슬렀다. 적어도 자기 충족적 예언 정도는 될 테니까.


고독감이란 생소한 감정이 슬그머니 찾아와 마음을 한 구석을 두드린다. 좁은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도시, 아무도 없는 방,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 오로지 핑크빛 네온만이 나를 맞이했다.



## 도움될까 싶은 여행정보

- 보즈테페(Boztepe)

Boztepe Çaybahçesi로 검색해서 가면 된다.

메이단 공원에서 출발, 구글맵 도보 경로로 찾으면 500미터 정도 가깝지만 가파른 계단, 외진 골목길을 지나야 한다. 밤늦게까지 야경을 관람하고 올 여행자라면 자동차 경로를 찍고 걸어오는 걸 추천한다.

- Hotel Efe

부킹닷컴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를 골랐다. 계단이 좁고 가파르지만 위생상태는 나쁘지 않다. 리셉션에 말하고 2층 식당에 짐을 맡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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