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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Dec 22. 2021

청포도 사랑


     청포도 사랑     

 ‘아버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

                  ·

 혹 내게 글쓰기에 다소 소양이 있다면 아버지의 유전자에서 왔을 것이라 믿고 있는 이유가 있다. 간혹 지상에 글을 올리기도 하셨고 언제나 글을 가까이하며 배우고 읽고 쓰는 것을 즐겨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유난히 아버지와는 비슷한 감성을 가지고 있어 자라면서 아버지를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었다. 봄날, 마당에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다 술상을 청하실 땐 20대의 나로서도 아버지는 예사롭지 않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내시곤 했다. ‘사랑하는 큰딸에게’로 시작하면서 ‘밖에 날씨를 보니 잦은 비도 오고 네 생각이 난다. 잘 있느냐.…….’ 첫 자식에 대한 애정이 커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내게 주신 사랑은 각별한 편이었다.

 당시로서 흔하지 않은 유치원을 박봉에 보내셨던 것이 부모가 되어 보니 첫 자식에 대한 그 마음이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고도 초등학교 입학 전에 가죽 가방과 책상을 맞춰놓고 등교를 기다리시던 분이었고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당시로서는 귀했던 파카 만년필과 ‘데미안’을 선물해 주셨다. 고등학교 시절엔 야외전축이라는 것을 준비해 주셔서 한참 힘들었던 객지 생활의 외로움도 너끈히 견딜 수 있게 하셨다.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부모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었음에도 아버지는 그것에 언제나 마음 아파하셨다. 어쩌다 올라오시면 화장실에 들어가 울고 나오시던 것을 보곤 했으니. 간혹 다 큰 여식에게 팔베개를 즐겨해 주셨는데 그것이 몹시 불편했던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50을 훌쩍 넘긴 딸이 여전히 사랑스러워 뺨에 입을 맞추실 때는 웬일인지 이제 그것이 그다지 거북하지 않았던 이유는 또한 모를 일이다.   

 우리 집 두 딸은 아버지와 변죽이 가장 잘 맞았다. 딸들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을 해주셨고 어머니 몰래 주시던 용돈도 꽤 넉넉했다. 딸들을 데리고 외출이라도 하려 하면 돌아봐라, 걸어봐라 요구가 많으셨지만 참 귀히 여기셨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흉하게 말이라도 할라치면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그리 말하지 말라 않고 절대적인 내 편이셨다. 속에 말을 감추시지 못해 흥분이 따를 때도 있지만 그렇게 아버지와 맞장구라도 몇 분 동안 치고 나면 무언가 개운한 것이 있어 나는 한동안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는 불콰하게 술이라도 한잔 하고 오시면 ‘청포도 사랑’을 부르시곤 했다. 정작 좋아하시는 ‘선창’은 흥겹게 부르는 것 같은 데도 서서히 애절해져 어린 맘에도 가슴에 박하향이 싸아 돌던 기억이 난다. 그래선지 ‘청포도 사랑’을 부르실 때가 좋았다. 아침이면 기억에도 없는 용돈을 두둑이 주시기도 했지만 ‘선창’을 부르실 때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였다. 아버지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보는데 사실일지 모른다. 그래도 아버지가 “우울려-고 내가 왔던가, 우슬려고어 와았던가~” 흥얼대시는 것에 박자를 맞춰 드리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선창’만 좋아하셨던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언짢은 소리와 같이 들고 오신 중고 미제 전축에서는 쉴 새 없이 ‘쎄드 무비’와 ‘코리나 코리나’가 흘렀다. 딸이 듣는 음악방송도 자주 들으셨는데 RCA 라이선스 음반을 들고 오신 날은 몇 번이나 트랙을 돌리라고 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나의 아버지는 멋을 아셨던 분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버지는 또한 대단한 애처가이셨다. 그러나 그건 그것이었고 살짝살짝 몰래한 사랑이 꽤 있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잘 넘기셨던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서였을 게다. 입버릇처럼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엄마는 열두 살에 돌아가시고…”, 이렇게 말씀하실 땐 자식을 버린 어미나 된 듯 송구해져 아버지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아내가 봐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남편의 마음 때문이었다.

 언젠가 고열로 고생하시며 이불을 뒤집어쓴 채 ‘엄마, 엄마’하고 우실 때는 아버지를 토닥이며 나도 울었던 생각이 난다. 그래서 어머니는 항상 아내이면서 아버지의 좋은 엄마였고, 아버지 수첩 속 우리 사진과, 우리가 아버지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큰 이유였다. 

 생각해 보면 자식에게 애틋하셨던 것이나 배움에 게으르지 않았던 것은 어린 당신에게 보낸 보상심리와 양 것 배우지 못한 공허에서 온 것은 아니었을지. 평생 허기와 상실감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던 아버지다. 위로와 사랑으로 치유받고 싶었던 어린 아버지에게 ‘엄마’란 단어는 눈물 나게 그리운 모정이었을 것이다. 

 그렇던 아버지가 아무 말씀 없이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만 계신다. 바보가 되셨다. 4-5년 전부터 몇 차례 치른 마음고생을 한 탓 인지, 무엇보다 아들 같은 막내 사위를 근래에 먼저 보내셨으니 아버지로서 충격은 상상할 만하다. 한두 해 만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지신 까닭이다. 아끼시던 자식 이름도 부르지 못하시는 바보. 아내 없이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가 되셨다. 

 “나 가는 것은 괜찮은데 너희 두고 엄마 아까워 어떻게 가니”

의식이 또렷할 때 곁에 있는 딸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제 정말 부모님이 되어 드릴 기회를 아버지는 주신 모양이다. 점점 아기 같은 나의 아버지. 딸이 내려가 ‘청포도 사랑’을 불러 드리면 금방 일어나실 것만 같다. 열심히 부르고 또 부르면 예전처럼 박자를 맞춰 주시지는 않을까. 어쩌면 눈을 감고 지금 엄마를 찾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늦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 봐야겠다. 어린 아들 꿈속의 엄마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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