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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Dec 26. 2021

타자기에 대한 추억


   타자기에 대한 추억     

 우리 집에는 연도를 알 수 없는 타자기 한 대가 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이웃이 폐기처리하려던 것에 놀라 귀하게 모셔온 물건이다. 제작사가 ‘크로버’인 것을 보면 족히 20여 년은 되었음직 하건만 상태는 좋은 편이다. 들은 바로는 곧잘 사용하던 것이라는데 그럴 일이 점차 뜸해지면서 관리가 불편해 폐품으로 내어 놓으려던 중이라고 했다. 당시 내 흥분은 조금 과장해서 ‘심봤다’를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타자기에는 아직 식지 않은 까만 테이프가 예쁜 리본처럼 둘려 있었다. 급한 마음에 양쪽 손잡이를 돌려 A4용지를 끼우고 자판을 ‘탁탁’ 내려치자 글자가 도돌도돌 요술처럼 박혀 나왔다. 얼마나 놀랍고 기특한지 마냥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우리 집을 들리는 모든 이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신기해하며 한 번씩은 힘을 주어 탁탁 쳐보지 않은 이가 없다. 그래선지 이제 테이프는 제 색을 잃었고 종이를 끼우고 자판을 두드려도 글자는 맹탕이 된 지 오래다. 

 타자기에 매료된 계기가 있다. ‘타이프라이터’라는 협주곡을 통해 경쾌한 금속성에 흥미를 가지고 들으면서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악기는 말 그대로 ‘타이프라이터’. 유머에 가득 차, 마치 농담 같기도 하면서 위트와 재치가 넘치는 짧은 곡이다. ‘따도다 다닥 딱, 또도 독 똑딱, 탁, 치익’ 반복되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면 빙그레 웃음을 짓게 한다. 그리고 유쾌하다. 무겁기만 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장난처럼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새로웠고 지금도 우연히 듣게 되면 역시 기분이 경쾌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타자기가 매력적이라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보다 먼저 영화를 통해서였을지 모른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기사를 전송하기 위해 급히 타자를 치던 미남의 종군기자 모습이라든가 아무렇게나 널려놓은 탁자 위에 타자기를 놓아두고, 아니면 어딘가에 그저 올려만 놓은 채 자유로운 복장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쉴 새 없이 문장을 만들어가는 작가들을 화면에서 보면서다. 혹은 다소 차가워 보이기는 하나 연주를 하듯 손가락이 자판 위를 오가던 영화 속 여비서 모습에선 나와는 거리가 먼 능력을 보기도 했다. 

 타이피스트라는 말이 당시로서는 참 세련된 용어였다. 그래서였는지 여고를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타자 학원에 등록한 친구가 있었는데 1분에 몇 타를 쳤다는 둥 하는 말이 참 근사하게 들렸다. 친구는 텔렉스도 배워 실력이 월등했는데 텔렉스의 전문성과 기능을 설명하며 자신을 은근히 뽐냈지만 오로지 부러웠던 것은 1분에 몇 타를 쳤다는 그녀의 타자 실력이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멋진 ‘그’ 타이피스트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였을 게다. 

 학교를 졸업하고 잠깐 의류 전담 무역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다. 타자기를 처음 본 것은 그곳에서다. 마냥 신기하여 만져보고 싶어 담당자가 자리를 비울 때라든지 잠시 손을 쉬고 있을 때면 조심스럽게 작동해 보았던 경험이 있다. 복사를 하기 위해 까만 습자지를 백지 사이사이 끼우고 약간 둔탁한 소리를 내며 힘들게 타자를 치는 모습 또한 흥미로워 곁눈질이 잦지 않았을까 한다. 

 무엇보다 타자기를 사용할 때 나는 소리들은 참 독특했다. ‘따닥’ 대는 자판 두드리는 소리는 물론이고 종이를 끼우기 위해 둥근 손잡이를 살살 돌릴 때면 ‘드르륵’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도 매우 좋았다. 글자 한 줄이 다 차면 ‘땡’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줄을 바꿀 때 나는 ‘치르륵 철거덕’ 하는 약간 고음의 소리는 정말 명쾌했다. 자판을 칠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나 글자를 찍어 대던 활자 대가 마치 피아노 속 나무망치처럼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즐거웠던 기억이 타자기에는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타자기와는 많이 다르지만 직접 자판이라는 것을 두드리게 되었다. 486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였는데 예전 타자기 자판보다는 훨씬 부드러웠지만 뭔지 모를 그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얼마나 열심히 놀이처럼 쳤던지 무난히 워드프로세서 시험에 통과할 정도였다. 기계치인 나로서는 신통할 지경이다. 모두 타자기에 대한 향수 덕분이다. 

 며칠 전에 지구 상 오직 하나 남아 있었던 마지막 타자기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보도를 접했다. 까맣게 잊고 있던 타자기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얌체처럼 매끈한 컴퓨터 글자에선 맛볼 수 없는 온기가 타자기에는 있다고 한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가끔 그리워할 테지. 경쾌한 타자의 음과 따끈따끈 막 빼냈을 때 박혀 나온 도돌도돌한 활자들. 여전히 앞으로도 따라 하지 못할 그들의 멋진 스타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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