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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Dec 19. 2021

그렇게 목이 메인다

     그렇게 목이 메인다     

   울지 마 엄마 돌아가신 지가 언제인데 너처럼 많이 우는 애는 처음 봤다 

   해마다 가을날 밤이 깊으면 갈대잎 사이로 허옇게 보름달 뜨면 /

   내가 대신 이렇게 울고 있잖아     

 정호승 시인의「귀뚜라미에게 받은 짧은 편지」전문이다. 처음 시를 접하고 가엾은 저 아이한테 대신 울어 줄 귀뚜라미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이제 그만 울어. 저렇게 달래주는 착한 귀뚜라미를 봐서라도’ 그리고 안 된 마음에, 실은 부러운 마음에 나도 그만 울어 주고 말았다.

 최근 많이 울어야 할 일이 있었다. 별일이 아니건만 길을 가다가도, 음악을 듣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선잠에서 깨어나, 혹은 특정 단어만 들어도 그만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슬픔이고 아픔이어야 했던 혼자만의 큰일이었다. 누군가와 말을 하다 눈시울이 붉어져 그를 당황하게 만들고 했는데 어쩌면 울어야 할 일에다 이런저런 서러움이 함께 있어서였는지 모른다. 

 그런 내게 가까운 사람은 지금 나이가 몇인데 그렇게 우느냐며 핀잔처럼 한마디 한다. ‘네가 알아, 나를?’ 그것이 야속해 또 울고 만다. 귀뚜라미처럼 달래 줄 재간이 없는 사람이니 울고 있는 사람이 불편하기도 했을 테지. 하긴 바보이긴 맞다. 이 만큼 살았으니 울고 웃는 감정쯤은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잘 울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 주시며 눈 밑에 우물을 팠느냐고 놀리셨다. “어디서든 먼저 울면 지는 거야” 어머니가 토닥이며 그때 해주신 말이다. 잘 우는 자신이 정말 싫을 때가 있다. 내 울음이 상대에게 통쾌감을 줄지도 몰라 속상하다 못해 부끄럽기 짝이 없을 때다. 기필코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건만 참고 참아도 꾸역꾸역 나오고 마는 데는 어찌할 바가 없다. 그러고 나면 상대에 대한 부담감과 울렁증으로 한참 동안 고생을 해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웬만해서 다투는 일도 거의 없지만 누군가를 이겨본 적도 별로 없다는 기억은 그리 틀리지 않을 터이다. 그래도 간혹 다투는 일을 피하지 못해 부딪치고 말 때가 있다. 그럴 경우 의외로 상대의 눈물을 기습적으로 보는 순간이 있는데 그러고 나면 슬그머니 격했던 감정은 무너지고 거꾸로 내가 잘못했나, 죄스러워지기까지 할 정도니 못나도 한참 못났다. 

 우연히 내 울음의 원인과 이유를 분석해 본 적이 있다. 가장 먼저 인 원인을 DNA에서 찾았다. 그것도 친가 쪽이라 강하게 믿을 수밖에 없는 큰 이유가 아버지도 울음을 지극히 참지 못하셨다. 그래서 난 아버지를 더 많이 사랑해야 했다. 큰아버지며 고모, 사촌 형제들은 물론이고 덩치 큰 남동생과 전형적인 외향성에 낙천적이고 쾌활하기만 한 여동생까지 언니처럼 잘 운다. 

 그런데도 유난히 더 잘 우는 이유가 지나치게 심약해서 일 것이라는 생각에 좀더 무게를 두고 있다. ‘의지의 한국인’이라 할 내면의 정신력이 내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제멋대로인 힘이 센 상대를 만나게 되면 맥없이 쉽게 지치고 마는 것을 보면 확실한 듯하다. 그러니 헛똑똑이에 나잇값도 못 하고 마음만 여리니 세상살이가 취약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너는 그게 고질병이라고, 주변 걱정을 듣는 것은 해서 당연할는지 모른다. 

 또 다른 이유는 혹시 무의식 저변에 자리하고 있을 상처, 혹은 자기연민에서 오는 것은 아닐지 유추해 본다. 환경이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는 추측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객지에서 고단함을 혼자 해결해야 했으니 얼마나 서럽고 외로웠을까 짐작할 만해서다. 소심한 데다 내성적이고 붙임성 없는 여자아이로서는 꾹 참던지 혼자 울다 이겨내야 했을 테니 엄마 잃은 저 아이처럼 새삼 그 아이가 가엾어 다시 울려고 한다. 

 한편 이것도 이유가 된다면 지나칠 만큼 쉽게 동화되는 헤픈 감성 탓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조금 더 감동하여 울고, 누군가의 따뜻함에 울고, 귀 기울여 듣다가 울고, 바라보다 울고, 그가 울어 울고, 내일 같아 울고, 훅 스치는 오래전 향기에 눈물이 나고, 애틋하여 뭉클하고, 위안에도 아픔에도 촉촉해 져 이렇게 시큰대고 마니 확실하다. 무엇보다 어딘가에 사무칠 때는 비극처럼 흑흑 대다 주룩주룩 눈물을 쏟아야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으니 큰일이다.

 흔히 사람들은 처절한 것이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피눈물을 흘려야 할 만큼 사는 것이 아프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또 그렇게 아름다운 것도 삶이지 않던가. 많은 문학작품을 비롯해 위대한 예술이 상처와 슬픔에서 탄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정호승 시인은 자신의 문학적 정서는 그늘과 서러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선지 그의 시를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아픔과 눈물이 따뜻하게 치유되는 것을 느낀다.

 상처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도 말고, 울 줄 모르는 사람과는 친구도 하지 말라 누군가는 말했다. 언젠가 그리 가깝지 않은 이가 눈썹이 빨개진 채 찾아와 아무 말 없이 울다 간 적이 있다. 차 한 잔 그저 대접해야 했지만 이른 아침 나를 찾아 서럽게 울자, 그가 갑자기 같은 편처럼 느껴졌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는 것이 시려 목이 메는 세상이다. 쌀쌀맞은 사람이,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사람이, 너무 잘나 인생에 져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제 조금씩 불편해 지고 있다. 바스러질 듯 말라 가랑잎처럼 까칠한 사람보다 유치한 것에도 촉촉이 마음을 움직여 함께 울 줄 아는 다정한 사람이 그래서 좋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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