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희 Mar 13. 2022

부끄러운 나

 아이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조금 오래전 일이다. 어느 그림 동화를 읽으면서였는데 사랑이 깃든, 마음 따뜻하면서도 가슴이 아렸던 기억이 있다. ‘저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누나일 수 있을까’. 잠시 숙연해지기는 했지만 저들의 현실은 단지 곤궁한 먼 나라의 이상한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아이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채 감동과 연민이 그들을 가엾게 했다. 그저 상상만이었다. 

 너무 가난해 며칠을 굶은 아이들은 부모 없이 큰누나와 산다. 배고프다 조르는 누나에게 누나는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누나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겠다고. 아무리 기다려도 조리대에 서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기만 하는 누나에게 동생들은 칭얼대며 떼를 쓴다. 그러자 누나는 입술에 검지를 세우고 조용조용 다정하게 말을 해준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천천히 즐겁게 기다려야 한단다. 그러니 조금만 더 재미있게 놀면서 기다리렴. 

 아이들은 배고픔도 잊은 채 누나 말에 끄떡이며 다시 신나게 놀고 있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대로 마냥 행복해하다 녀석들은 하나 둘 지쳐서 쓰러지더니 스르르 잠이 들고 만다. 누나는 그제여서 야 행복하게 잠든 동생들을 바라보다 진흙으로 과자를 굽기 시작한다. 

 서울은 폭설로 고생인데 카리브 연안에 있는 큰 섬나라 아이티에서 상상할 수 없는 강진이 일어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이다. 아이티? 아이티? 하고 있는데 아, 바로 그 아이티였다. 그러고 나서 각종 매스컴에선 끔찍한 상황을 경쟁이라도 하듯 정신없이 보도하고 있는 것이 벌써 열흘이 지났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현대사 최악의 참사라고 떠들면서도 모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다. 아이티 정부는 정부대로 지원국은 지원국대로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들로서도 막막한 것이 이곳에 있는 나와 별다르지 않을 테니. 피해액과 사망자 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란다. 졸지에 당한 죽음의 수가 수십만에 이를 것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셈할 수 있었던 것인지. 현장에 있는 것처럼 흔들리는 영상 또한 아직 여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온전한 집 한 채 있을 리 없는 아비규환 속에서 유독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동화가 생각 나서였을까. 범벅된 잔해에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아이가 겁에 질려 누나를 찾고 있는 것만 같다. 촉촉이 젖어 초롱초롱함이 더한 검은 눈망울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아리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먼지부터 털어 내고 놀라 우는 애를 꼭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얼른 “아가, 괜찮아, 괜찮아” 이렇게 토닥여 주어야만 할 것 같다. 

 아수라장 한쪽에 불편한 다리에 얼굴 반을 붕대로 감고 있는 젊은 청년이 보인다. 이리저리 헤매며 소리쳐 울부짖는 것을 보니 가족을 찾나 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찾을 수는 있으려나. 쓰러진 건물 더미 속에서 시체를 꺼내다 오열하는 저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수많은 부상자를 수용 못 해 곳곳마다 환자가 넘쳐나고 무정부 상태의 거리는 치안이 위태로울 정도란다. 무엇보다 저 많은 고아들을 어째야 하나.

 그런데 이렇게 어쩌지 못해 마음뿐인 나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망설이지 않고 거액을 기부한 유명 배우들이며 모금을 위해 공연을 하는 사람들, 속전속결이 어려운 현장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떠나는 자원봉사자들이 그들이다. 그래서 세상은 참 따뜻하고 살만한 곳이라고 사람들은 말하나 보다.

 한편에서는 또 낯선 아이티에 대한 분석이 시끄러울 만큼 분분하다. ‘HAITI’가 왜 ‘아이티’로 발음이 되는지, 아이티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는지, 부유했던 아이티가 왜 진흙 과자를 먹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는 그런 만큼 들을 만하다. 누구는 명성에 비해 기부를 덜했다느니, 아직도 하지 않고 있다느니. 후원금을 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느니. 이런 말이 오갈 때는 찾아가 그들에게 묻고 싶어 진다. 하여 당신은? 하고.

 정작 낯 뜨겁게 하는 것은 진흙 과자가 그렇게 유해하지만은 않다며 건강에 좋은 점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흙 먹는 것이 특정 질병을 가진 태아의 면역력을 높여 주고 칼슘도 보충해 준다며 약학적 기능도 알려준다. 건강에 해를 끼친 사례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이리 말하지 않아도 진흙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그러고도 잘못되었다는 말은 없었으니. 황토가 건강에 좋다는 것쯤 알고들 있으니. 그러나 진흙이 먹을 것이 없어 허기진 아이들의 식량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건강식으로 진흙을 거론하는 것이 그럴 만한 일인지. 진심을 다해 지금 내가 부끄러운 또 하나의 이유이다. 

 그래, 어쩌면 동화는 외부에서 바라본 연민의 시선일지 모른다. 처참함이 조금은 미화되었을 수도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흙 과자와는 다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아에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양식이 되는 음식임에는 틀림이 없지 않은가. 언제 재앙에서 벗어날지 모르는 아이티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참으로 나를 부끄럽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한다.

 내게 닥치지 않은 것이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다행인, 상상을 초월한 타인의 불운을 바라봐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바라보는 심정만은 내 일처럼 절실한 것이 인간적인 감성이다. 지금 아이티 일이 그 마음일 터이다. 그러나 쉽게 시작할 수 없고 동참할 수 없는 일이 아이티를 돕고 있는 그들처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처럼 할 수 없는 용기, 그들보다 턱없이 부족한 의로움과 좀 더 나눌 줄 모르는 내 이기심이 그들에게 내가 부끄러운 가장 큰 이유이다.

                                                                       2010년 1월

작가의 이전글 그래서 우리 행복하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