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희 Jan 09. 2022

 상처를 줬다면 미안해

    상처를 줬다면 미안해 

 날이 새려면 아직도 먼 새벽녘이다. 서너 시간은 더 눈을 붙여야 할 텐데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지를 못하고 있다. 이게 다 꿈 때문이다. 꿈은 단지 몇 분 동안에 일어나는 초단기 상황이라는데 마치 긴 이야기처럼 꿈속이 생생하다. 어딘가를 급히 가야 해서 부리나케 주차장으로 내려 가 ‘내 차’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넓은 주차장 아래위를 찬찬히 훑으며 찾고 있지만 정말 아무 곳에도 없다. 서서히 다급해져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거리는데 시장바닥에서 아이를 잃은 것처럼 두려워지더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가 찾는 것이 차가 아니고 아이가 되어 버렸나 보다. 아가, 얘가 어디 갔나. 어디서 고생을 하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고 했는데. 엄마가 가버렸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아가, 아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흑흑 대며 울다 깨어나 정신을 차리자 찾는 대상이 명확해졌다. 

 주차장에 있어야 할 그 녀석은 이미 나를 떠난 지 오래고 새로운 녀석이 다시 왔다는 사실도 그때 서야 들었다. 이런 바보,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기운이 하나도 없다.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해몽 좀 해보라고 가까운 사람에게 밀었더니 쓸데없이 넘치는 고놈의 정 때문이라며 심하게 책하기만 한다. 

 하지만 정이 문제가 아니라 기억력 이상에서 오는 웃지 못할 오류 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실제 남의 차에 키를 꼽을 때도 여러 번 있었던 것을 떠올리면 틀리지 않은 현상이다. 늘 하던 일도 깜빡깜빡 놓치고 갑자기 흔히 아는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 빈번해지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니 이는 분명하다. 그리 생각하면 대단히 걱정스러운 일인데 오히려 감정을 조절 못해 나잇값까지 못하는 심약한 것에 비하면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면 한동안 보내버린 차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했던 것도 사실이다. 낯선 냄새를 풍기며 곁에 있는 녀석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고 이미 멀리 가버린 녀석을 생각했다. 무슨 의리가 있어서도 아니 건만. 기실 내가 이러는 것은 비단 차뿐 만이 아니어서 잎이 넓은 화초 하나가 아침저녁으로 큰 즐거움을 준 적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잎사귀가 기운을 잃더니만 시름시름 대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하여야 할지 어디가 아픈 것인지 안절부절못하다 떨어진 잎사귀를 들고 화원으로 급히 달렸다. 자신이 아파도 병원 가는 것이 소홀한 편인데 지켜보고 있으려니 애가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소생할 수 없는 병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그냥 죽이세요, 한다. ‘오, 세상에! 그냥 죽이라고?’ 반려동물을 키우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데. 그리고 나는 한동안 다른 화초에 마음을 주지 못했다.  

 얼마 후면 아주 가까운 사람과 조금 오래 이별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벌써부터 마음 한구석이 빈 듯하다. 갈 사람은 얼른 가야지 하면서도 보내고 나면 아마 지금 꾼 꿈같은 짓을 하고 말 것이 걱정이다. 살아오며 수없이 많은 헤어짐을 경험했는데도 이별이라고 하면 공허가 앞질러 와 심히 아프게 한다. 물론 이별이라고 하여 모든 헤어짐에 그렇지는 않다. 가끔은 제발 떠나 주었으면 할 때도 있고 빨리 떠나고 싶어 조급증을 낼 때도 있었으니까. 그렇기는 해도 깊은 정에 싸여 함께 했던 누군가와 치러야 하는 오랜, 혹은 영원한 이별은 할 짓이 못 된다.

 ‘정 떼려고 그래’라는 말을 그래서 나는 참 가슴 아파한다. 헤어질 시간이 올 무렵 멀리 떠날 상대가 조금씩 안 하던 궂은 짓을 한다든가 괜한 심술을 끊임없이 부려 상대를 속상하게 할 때 하는 말이다. 그러나 헤어지는 서운함을 그렇게밖에 행동 못 하는 떠나야 할 자의 안타까움이라는 것을 상대는 모른다.

 그러니 심술을 부리는 쪽이나 마음 상하는 쪽이나 서로 심정을 알아주어야 할 텐데 정말 정이 떨어질 때가 있고 그 맘을 몰라주어 눈물을 삭히며 떠날 때가 있다. 얼마나 쓸쓸하고 서러운지 그리 떠나와 본 적이 없는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정을 뗀 쪽은 가는 쪽이 아니라 보내는 쪽은 아닐까.

 친정엄마를 모시고 살던 작은 올케가 엄마를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드려야 할 상황을 겪었다. 엄마에게 혈육이란 이 딸밖에 없었으니 두 모녀는 기가 막힌 사이였을 것은 짐작만으로는 부족하다. 쉬이 떠나시지 못하던 어머니는 아끼던 딸에게 가슴 울리는 말만 하다 가셨다.

 모든 일을 치르고 엄마가 기거하던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무서움이 달려들어 쉽게 들어갈 수 없더란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정을 떼고 가셨다고 말을 했다. 너 편히 잘 살라 그리하고 가셨다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그 말에 내가 왜 도리 없이 그만 마음이 아팠는지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그것에 위로받는 딸을 보며 나는 많이 서운했다. 

  나를 떠날 것들, 어찌할 수 없이 보내야 할 것들. 이제 그리 치러야 할 이별들이 내게 얼마나 더 남아있는 것일까. 인연에서 만나고 헤어짐은 불가항력이라는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 다 알고들 있다. 그러니 너무 서운해 말라고, 슬퍼하지 말라 누군가 일러 준다면 눈물은 참아 볼 테다. 그래도 정 떼는 일만은 제발 하지 말았으면, 정 떼고 가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지나가 버린 이별들을 잠시 돌이켜 본다. 그러자니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마 내 잘못이 큰가 보다. 혹시 내가 서운하게 했다면 용서해 줘. 네 맘도 알지 못한 채 너를 무심히 보냈다면 그 맘을 몰라서였을 거야, 미안해. 아픔이 있었다면 상처 없이 잘 아물었기를 바랄게. 

 새삼 그리워진다, 나를 떠난 것들이.

작가의 이전글 가버린 연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