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캠핑을 가기로 했다. 남편이 사다 쟁여둔 캠핑 장비가 드디어 애물단지가 아닌 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행을 떠날 때 최소한의 짐만 챙기는 스타일이었는데 아이가 있는 캠핑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텐트부터, 테이블, 의자, 조리도구 등등 온갖 짐을 다 챙기고 나니 벌써 여행을 다녀온 것 같다.
이제 모든 짐의 하이라이트. 준이 짐을 쌀 차례다. 어른들이야 하룻밤 정도는 옷 하나로 버텨도 되지만 아이 짐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 짐을 싸야 한다. 더욱이 계절이 바뀌는 이 맘 때는 자칫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더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
요 며칠 더웠으니 여름옷을 몇 개 챙긴다. 여름 내복도 두어 개 챙기고, 반팔, 반바지도 몇 개 챙긴다. 해묵은 모자와 서랍 구석의 선크림도 꺼낸다. 요 며칠 날씨와 일기예보를 보아하니 꽤 더울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긴팔, 긴바지 내복도 하나 챙긴다. 준이 샴푸, 로션, 치약과 칫솔 그리고 체온계, 해열제, 밴드 등 상비약도 챙겨야 마음이 편하다. 준이 애착 인형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니 마지막에 잘 챙기기 위해 메모를 적어 현관문 앞에 붙여둔다. 이렇게 하면 필수품은 어느 정도 챙긴 거고 여유가 된다면 장난감도 몇 개 챙기는 것이 좋다. 남편 옷은 알아서 챙기겠고 나는 여벌 옷 하나아 칫솔 정도면 충분하다. 캠핑이란 원래 이런 거지.
얼핏 보면 6박 7일 정도의 일정처럼 보이는 짐을 싣고 하룻밤 외박을 위해 길을 나선다. 가기 전 짐을 싸고, 다녀와서 짐을 정리하는 건 참 고되지만 역시 떠난다는 건 설레는 일이다. 공룡 노래에 맞춰 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목적지를 향해 쌩쌩 달린다. 이제 곧 도착이다.
도착지에서 우릴 가장 먼저 반겨준 건, 두두둑 두두둑... 예고 없이 내리는 비였다. 아... 나는 왜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비"를 고려하지 못한 것인가. 차가운 비 덕에 온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다. 남편은 비를 맞으며 텐트를 치고 나는 가방을 뒤져 하나뿐인 긴팔, 긴바지 내복을 준이에게 입혔다. 가져온 겉옷이 도톰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툭하면 콧물, 걸핏하면 기침이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는 편인데 오늘은 글렀다.
어찌 됐든 하룻밤 묵을 우리 집, 텐트가 완성되고 아이는 신이 났다. 신이 나는 건 좋다만, 이 "신" 문제였다. 빗물을 첨벙첨벙 튀기며 놀아대니 하나뿐인 긴팔, 긴바지가 금세 젖어버렸다. 아이가 무슨 잘못이겠는가. 다 짐을 잘못 싼 내 탓이지. 어쩔 수 없이 긴팔, 긴바지를 벗겨내고 얇은 옷을 두 개 겹쳐 입히고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겉옷까지 단단히 입힌다. 제발 감기 걸리지 않길.
여행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인생은 항상 이런 식이다. 머리를 짜내며 최대한 경우의 수를 고려해 준비해도 늘 뒤통수치는 것. 계획이란 인생이란 커다란 톱니바퀴 속에 와그작와그작 종이 쪼가리가 되는 것. 아. 오늘도 그렇구나.
그러면 다시는 여행을 떠나지 않을 것인가. 다시 경우의 수를 늘리고 늘려, 짐을 늘리고 늘려 최대한 단단히 준비할 것인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다. 하지만 여행을 다시 떠나지 않는 것은 싫고,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게 또 추억 아니겠는가.
두두둑 두두둑 텐트 위를 때리는 빗소리가 정겹다. 자의로는 절대 하지 않을 우중 캠핑도 꽤 괜찮네. 일 년 치 비를 모두 다 구경할 판이다. 일단 챙겨 입혔으니 괜찮겠지. 감기 걸리면 어쩔 수 없지. 감기야 나을 테고. 그냥 이대로도 참 좋구나. 슬슬 미소가 지어진다. 오늘 여행도 꽤 괜찮은 여행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