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이 좋다. 한 때는 여행을 좋아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여행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 게 아니었을까. 집을 그리워하기 위해 떠난 게 아니었을까. 하얗게 바스락거리는 호텔 침구보다 닳을 대로 닳아 색이 바랜 보드라운 내 이불이 좋은 그냥 타고난 집순이다.
어릴 적에는 내 방을 갖는 게 소원이었다. 내 방을 가지고 나서는 내 집을 가지고 싶었다. 기숙사에서 고시원, 원룸을 전전하며 집에 대한 갈망은 보름달처럼 커져만 갔다. 머릿속에서 지었다 부순 집이 몇 채인지. 온통 내 취향으로 꾸민 집. 가구와 벽지부터 작은 선반 위 장식품 하나까지 고르고 골라 꾸민 집. 어른이 되면, 결혼을 하면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꿈은 멀기만 하다.
지금 우리 집은 취향보다 생존을 위한 곳이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공간이다. 아마도 나보다 조금 어릴 이 집을 2년 전세로 살고 있다. 한 번도 고친 적 없다는 이 집은 지난 세월속 상처와 훈장으로 가득하다.한 때는 새하얀 색이었을 벽지는 (아주 좋게 보면) 아이보리 색이 되었다. 각가지 제 몫을 했던 못들은 이 집을 스쳐간 가족들 수만큼 곳곳에 일없이 박혀있다. 이 낡은 집은 이제 우리 집이 되어 우리들의 물건으로 가득 채워졌다. 좁디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물건들은 블랙홀처럼 무질서하고 분주하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로맨스가 없겠는가. 이 낡고 좁은 집에서도 나는 충분히 우아하고 낭만적이다. 캡슐 커피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우유 거품기로 우유를 데워 따듯한 카페라테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책꽂이에는 다시 읽어도 좋은 책들과 읽고 싶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잔뜩 꽂혀있다. 수수한 꽃무늬가 그려진 내 이불의 면 100%는 환상적인 촉감을 자랑하고 태블릿 pc, 텔레비전 덕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좁은 책상 위 옹기종기 모인 장난감들이 다정하게 내 방을 지켜주고 침대 위의 폭신한 인형들이 만들어주는 안락함은 그래비티 체어 못지않다. 물론 넘쳐나는 책들은 바닥에 쌓여가고 장난감들은 침대 밑 박스에 갇혀있고 겨울옷을 위해 여름옷들은 자리를 비켜줘야 하지만 뭐,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지금도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생각나면 글을 쓴다. 행복하다. 해가 지면 돌아올 수 있는 곳. 언제나 누워 편히 쉴 수 있는 곳.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일기를 쓸 수 있는 곳.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곳. 이 낡고 좁은 집이 참 고맙다. 오늘도 우리 집에서 하루를 가득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