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일단

by pahadi

비가 온다. 참 자주도 온다. 한 때는 비가 안 와서 난리였는데 요즘은 또 너무 많이 와서 걱정이다. 진짜 지구 온난화 때문일까. 갈수록 더 심해진다면 진짜 무서운 일이다. 환경보호를 위해 뭘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시계를 본다. 아차차. 출근해야지.


왕초보에게 비 오는 날 출근길은 지구 온난화만큼 무서운 일이다. 특히 오늘 같이 양동이로 들이붓듯 쏟아지는 날엔 아침부터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버스 타고 갈까? 택시 타고 갈까? 조금 더 일찍 길을 나설까? 물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간단한 문제지만 그건 너무 귀. 찮. 다. 언제까지 비 오는 날엔 차를 두고 갈 거야? 퇴근길에 준이 데리러 갈 생각도 해야지. 운전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가자. 각가지 핑계를 대지만 결국 귀찮음이 모든 것을 이겼다.


시동을 건다. 낯설어진 익숙한 길을 따라나선다. 두두둑 두두둑 내리는 빗줄기가 차에 꽂힌다. 세상에 쉬운 일 없다지만 사소하게 내리는 비 조차 넘어야 할 엄청난 산처럼 느껴진다. 이런 약해빠진 인간 같으니라고. 비가 오니까 운치 있고 얼마나 좋아. 빗소리 좀 즐겨보라고. 일찍 찾아온 더위도 멀찍이 도망쳤네. 쌀쌀해져 며칠 전에 산 긴팔 원피스도 조금 더 입을 수 있겠다. 아! 그리고 비가 오면 퇴근하고 준이와 놀이터에 안 가도 되잖아!


그렇게 비 오는 날엔 두려운 출근길도 있지만 좋은 점도 있다. 퇴근 후 준이를 데리고 집에 오는 길에는 원수 같은 두 개의 놀이터가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리 없듯이 준이는 절대 놀이터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몇 번쯤 집에 가자고 애원 봤지만 돌아오는 건 아이의 대성통곡 울음소리뿐. (가끔은 바닥에도 드러눕는다.) 그래, 아이는 아이답게 놀아야지. 어차피 놀고 갈 거 기분 좋게 놀아주는 게 낫지. 마음을 다독여도 하루 종일 시달린 몸뚱이와 허기진 배로 놀이터에서 준이와 놀아주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비가 오는 날엔 이 모든 일이 면제다. 역시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법. 비가 오는 날엔 하원 후 바로 집에 가서 누워서 책을 읽어주면 된다. 누워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다. 가벼운 오후를 생각하니 하루의 부담이 3분의 1쯤 줄어드는 것 같다.


그렇게 힘겨운 출근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뒤늦게 오늘 날씨를 검색한다. 이런, 점심쯤에는 비가 말끔히 갠단다. 나의 일장(一長)은 그렇게 비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가끔 이렇게 비 오는 출근길과 놀이터 시중이 함께 오는 날도 있다. 이럴 때는 생각한다. 자! 수련이다. 마음을 단련할 기회를 주시니 득도의 길로 가보자.(자, 눈물은 닦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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