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너무 덥다. 불쾌지수는 날씨에 따라서 불쾌감을 느끼는 정도를 수치화한 것으로 '불쾌지수=0.72(기온+습구 온도)+40.6 ' 로 계산한다. 요즘 같이 덥고 습한 날에는 당연히 불쾌지수가 높다. 쉽게 지치고 짜증이 난다.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도 날씨의 영향을 받는지 연달아 고장 나고 있다. 내 한 몸 챙기기도 힘든 이 더위에 무슨 시련인가.
시작은 에어컨이었다. 작년 폭염에 용감하게 에어컨 없이 맞섰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올해는 꼭 에어컨을 사리라. 적금까지 들어서 여름이 시작되기 전 5월 서둘러 에어컨을 설치했다. 당연히 가장 성능 좋은 것으로! 여름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에어컨이 제 임무를 시작해야 할 때쯤 문제가 생겼다. 너무 시. 끄. 러. 웠. 다. 이건 그냥 소음이 아니었다. AS기사님께서는 제품 자체의 불량이라고 하셨다. 구입 후 한 달 내라면 새 제품으로 교환이 되지만 2달이 넘었기 때문에 부품 교체만 가능하다고... 마음이 쓰렸다.
'한두 푼도 아닌데...'
하지만 규정이 그러한 것을 어쩌겠느냐.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우리 탓이라고 생각하며 속을 달랬다. 다행히 지금은 조용하고 시원하게 돌아가고 있다.
한 고비를 넘기자마자 이번에는 유모차가 고장 났다. 준이는 아직 잘 걷지 못해서 외출할 때 유모차가 필수다. 유모차의 부재는 곧 외출이 어려워진다는 것. 세상이 한창 궁금할 나이 2살. 준이에게 외출은 매일 필수인데 눈 앞이 캄캄했다. 유모차 AS는 기사님이 일주일에 한 번 우리 지역에 올 때 수거하셔서 수리 후, 다음 주에 가져다주신다. 최소 일주일 정도가 걸리는 것인데 사무실 이전과 여름휴가가 겹쳐 3주는 기다려야 유모차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더워서 짜증이 나는 건지, 고장 난 유모차에 짜증이 나는 건지, 브레이크가 걸린 유모차를 무지막지하게 끌고 다닌 힘센 내가 짜증 나는 건지 모르겠다. 다행히 언니에게 간이 유모차를 빌려서 최악의 상황은 면하는 중이다.
다음은 장롱. 문득 장롱을 봤는데 문 한쪽이 기울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언제부터인지 장롱과 문 사이가 멀어지고 있었다. 또 고장이다. 너무너무 귀찮다. 떨어진 경첩을 찾아봐야 하나? 경첩을 사다 고쳐볼까? 아니 그냥 못 본 척할까? 하지만 이 더위에 무거운 문을 죽을힘을 다해 지탱하고 있는 남은 경첩 2개가 불쌍해 결국 AS를 신청했다. 다행히 신속, 정확하게 고쳐주셨다.
한 여름 고장의 역사에 마지막은 전자 체온계였다. 준이가 열이 나서 체온을 재보려는데 전원이 켜지질 않는다. 며칠 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건전지가 튀어나올 정도로 세게 떨어졌다. '아니, 한 번 떨어뜨렸는데 고장이 나나?' 이제까지 쌓인 화가 모두 전자 체온계를 향했다. 그리고 남편까지 원망한다. "왜 내가 매일 AS를 신청해야 하지?' 심지어 고객센터는 통화량이 너무 많단다. '정말 되는 일도 없군.', '요새 재수가 없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까지.
딸칵! 드디어 받았다.
상담원 - "네. 고객센터입니다."
나 - "전자 체온계가 고장이 나서 AS 신청하려고요."
상담원 - "네~ 시리얼 넘버 불러주세요. 어떤 문제가 있나요?"
나 - "전원이 안 켜져요."
상담원 - "그럼 건전지를 다시 끼워보세요."
나 - "그건 해봤어요."
상담원 - "그래도 건전지를..."
나 - "여러 번 해봤는데..."
상담원 - "저희 제품은 건전지 2개가 +,- 반대로 들어가거든요."
나 - "네?!... 잠시만요."
온갖 짜증을 내며 일상 비하에서 인생 비하로 넘어가려는 찰나 체온계가 켜졌다. 건전지 문제였던 것이다. (아니, 너는 왜 건전지가 서로 반대로 들어가니... 오해했잖아.) 진짜 별일 아니었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AS센터에 가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전자체온계가 잘 작동되서인지, 괜한 화풀이가 무안해서인지. 어쨌든 체온계의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너무 쉽게.
이 고장의 역사의 결론은 "그래, 고장 나면 고치면 되지!"
지금 우리 집 에어컨은 잘 돌아가고, 유모차를 곧 잘 굴러갈 것이며, 장롱과 문도 다시 친해졌고, 체온계도 제 역할을 잘하고 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일 아닌 것을 이 더운 지구를 내가 1도 더 높인 것 같다. 고장 나면 고치면 간단할 것을 거기에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고 말았다. 결국, 문제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