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성 위염과 식도염, 이 환장의 콜라보 때문에 커피와 잠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커피와 나의 인연은 꽤깊다. 지방 연소를 돕는다고 하여 다이어트를 위해 아메리카노, 아침밥 대용으로 배부르게 카페라테를 즐겨 마시기 전 나의 오랜 옛 친구는 역시나 맥심 커피믹스였다.
나때만 해도 고3은 0교시부터 야자까지 즉, 아침 7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학교생활에서 생활했다. 가족보다 많이 보는 것이 친구고 내 방 침대보다 오래 붙어있는 것이 교실 책상이었다. 당연히 그때의 기억이라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놀고, 떠들고, 달리고(왜 달렸는지 모르겠다), 공부한 기억뿐이다. 사물함에는 장시간 학교생활에 대비해 온갖 비품들이 준비되어있었다. 쿠션(혹은 베개)과 담요는 기본. 정규 시간표가 끝나면 후다닥 갈아입을 체육복(혹은 잠옷)과 폼클렌징과 각종 여드름용 화장품. 유자차, 미숫가루, 꿀, 그리고 맥심 커피믹스 잔뜩.
2교시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잠시 긴 쉬는 시간이 주어진다. 말이 2교시 쉬는 시간이지 아침 0교시부터 달린 우리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20분 쉬는 시간 동안 우리는 최대한 잠을 깨고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그때 단골 메뉴가 바로 우유와 커피믹스였다. 우유급식으로 주는 우유에 맥심 커피믹스 하나를 뜯어 넣고 쉐킷! 쉐킷! 열심히 흔든다. 얼마나 열심히 흔드냐에 따라 즉시 커피알과 설탕이 잘 녹은 고품질의 커피 우유를 맛볼 수 있으니 언제나 의욕이 충만했다. 자칫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커피 우유가 새서 교복에 얼룩덜룩 흔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건 순전히 엄마의 문제이던 시절이었다.
커피와 설탕이 절묘하게 녹아든 달콤 쌉싸름한 맥심표 커피 우유는 허기짐을 채워주고 카페인의 각성효과까지 제공했다. 그리고 장점을 하나 더 찾자면 약간의 팔 운동까지! 저녁에는 우유가 없으니 자판기의 캔커피를 마셔야 했는데 그 특유 쇠맛이 영 입에 맞지 않았다. 내 입맛에는 적당히 달콤하고 적당히 쌉싸름하며 적당히 고소한 맥심표 커피 우유가 언제나 최고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학교 앞에 엄청난 가게가 생기고 말았다. 커피 전문점이 생긴 것이다. 줄지어 선 분식집 사이로 빼꼼 수줍게 고개를 내민 이 커피 전문점은 이름도 생소한 커피들을 팔았다. 캐러멜 마키아토, 바닐라 라테. 낯선 이름이지만 이건 분명히 맛. 있. 는.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차마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단 그것들이 무엇인지 모르겠다.(인터넷 검색해볼 생각도 못함)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친구들도 모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캐러멜 마키아토. 그것은 과연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 단어란 말인가. 하지만 언제나 집단의 힘은 위대한 법이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친구들이 모여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대망의 토요일. 토요일은 급식이 없어서 밖에서 밥을 사 먹고 들어오는 날이다.
"뭐가 맛있어요?" "단거요? 단거 좋아해요." "네! 그거 주세요." "휘핑크림이요? 올려주세요." 걱정과 달리 단 몇 마디로 내 손에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캐러멜 마키아토가 쥐어졌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친절하게 일러주셨다. "빨대로 휘핑크림을 살살 저어 커피에 녹여 먹으면 더 맛있어요!"
우리는 다 같이 구령대 밑에 앉아한 손에는 캐러멜 마키야토, 다른 손에는 빨대를 들고 아주 천천히 살살 휘핑크림을 저었다. 젖고 또 저었다. 천천히 또는 빠르게. 돌돌돌 말린 휘핑크림이 북극의 빙하처럼 부서지고, 폐수처리장의 거품처럼 흩어지다가 사라질 때까지 모두 젓는 일에 집중했다. 이제 휘핑크림의 흔적이라고는 조금 옅어진 커피 색깔뿐이었다. 휘핑크림과 얼음이 녹아 더 시원하고 부드러워진 캐러멜 마키아토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달콤했다. 참 맛있다. 너무 맛있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제 나에게 1등은 너다.
어제 먹었던 맥심표 커피 우유가 내 마지막 1등 맥심표 커피 우유가 될지 몰랐다. 숱하게 먹었던 1등 캐러멜 마키야토도 추억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렇다. 언제나 1등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