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흙 파는 걸 좋아한다. 모래 놀이터, 바닷가, 산 가리지 않고 흙이 보이면 일단 판다. 수많은 놀이기구를 제쳐두고 쭈그리고 앉아 흙을 파고 그 흙을 쌓는다. 아이는 진지한 얼굴로 흙 파는 일에 집중하고 나는 그 귀여운 진지함에 빠져든다.
워낙 좋아하니 열심히 파라고 작은 삽, 큰 삽, 긴 삽 골고루 사주기는 했지만 참 쓸데없는 일이다. 흙을 파서 그 흙으로 무언가 만드는 것도 아니다. 흙을 파며 무언가 찾는 것도 아니다. 그저 파고, 파고, 파고 흙을 쌓는다. 굳이 흙 파는 일의 목적을 찾는다면 흙을 높이 쌓는 정도? 그런데 굳이 왜?
사실 아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 그렇다. 넓은 공원에 가면 아이는 그냥 뛴다.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구경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목표 지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뛴다. 아이는 쓸데없이 무언인가를 쌓아 올리고 무너뜨린다. 이유 없이 높은 곳에 오르고 뛰어내린다. 뭐, 저렇게 힘을 빼고 나면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니 엄마로서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지만 비싼 밥 먹고 참 쓸데없는 짓을 한다.
그러다 책에서 인상 깊은 글을 읽었다. 땅을 파기만 해도 행복해진다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온갖 미생물이 들끓는 진짜 땅에는 인간의 뇌의 행복감을 높이는 미생물이 있다고 했다. (중략) 식물학자 호프 자런의 책 <랩 걸>에는 땅 파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농사가 아니라 실험용 샘플을 채취하려는 거라 늘 자연 상태의 땅을 파는 그녀는 땅 파는 일의 순수한 기쁨을 계속해서 찬양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땅을 파면서 행복감을 느끼게 되어 있나 보다. - 박해윤 <숲 속의 자본주의자> 중에서 -
어른들도 땅을 파며 행복감을 느낀다니. 땅을 파는 일에 과학적으로 정말 행복해지는 일이라니. 머리를 "댕"하고 얻어맞은 기분이다. 내가 얼마나 좁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를 다시 한번 느꼈다. 아이에게 "너 진짜 쓸데없는 짓한다"라고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나보다 더 커다란 아이의 세계를 판단하려고 하지 말아야지. (아이뿐만 아니라 그 어떤 타인의 세계도)
어린 시절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어른이 된다는 건 모든 즐거움과 가능성을 하나씩 잃어버린 일일지도. 다음에는 나도 같이 땅을 파야겠다. 그때 그 시절처럼 행복해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