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를 임신하고 임신성 당뇨 진단을 받았다. 인슐린을 쓸 정도의 수치는 아니라서 식이요법과 운동을 병행하기로 했다. 간식으로 토마토나 오이를 챙겨 먹고, 야채 - 단백질 - 탄수화물 순으로 식사하면 당 조절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다이어트가 목적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식단이지만 아이를 생각하니 그래도 할만했다. 다만 매일 즐겨마셨던 카페라테가 문제였다. 우유가 괜찮은 사람도 있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렇지 않았다.
하얀 쌀밥을 포기하는 것보다 카페라테를 포기하는 게 더 슬펐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침도 카페라테와 함께라면 견딜만했다. 커피 애호가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10년째 지켜온 나의 취향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방법을 찾아보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무가당 두유, 귀리 우유, 아몬드유 등이 우유 대체품으로 추천되었다. 귀리 우유는 몇 번 먹어본 적이 있다. 카페라테 전용으로 나온 귀리 우유 평이 꽤 좋았다. 이거면 되겠다. 귀리 우유를 넉넉히 주문했다. 오늘 아침은 귀리 우유에 디카페인 에스프레소를 타 마셨다. 귀리의 쌉싸름한 맛이 커피 맛과 어울려 나쁘지 않았다. 우유로 만든 카페 라뗴의 부드러움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나의 아침은 아메리카노였다. 여름에는 차갑게, 겨울에는 뜨겁게. 그렇게 몇 년을 살다 보니 위염을 달고 살았다. 빈속에 아메리카노는 너무한 것 같아서 카페라테로 바꿨다. 물론 우유도 위에 좋지는 않지만 이것이 나의 최대 타협안이었다. 카페 라테의 부드러운 맛은 금세 익숙해졌다.
여전히 주기적으로 위염이 찾아왔다. 이 정도면 그만 마셔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쉽게 커피를 끊을 수가 없었다. 커피 마시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빈 속에 마시지 않기. 하루 한 잔만 마시기. 나름 규칙을 정해가며 커피를 즐겼다. 나이가 먹어가니 카페인도 문제였다. 커피를 마신 날에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카페인은 위에도 안 좋았기 때문에 겸사겸사 디카페인으로 바꿨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소화가 잘되는 락토프리 우유로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이 집요한 커피 사랑은 새로운 난관 끝에 귀리 우유와 디카페인 원두로 만든 카페라테로 이어졌다. 귀리 우유와 디카페인 에스프레소는 파는 곳이 많지 않아 때에 맞춰 부지런히 주문해야 한다. 아메리카노에서 카페라테로, 카페인에서 디카페인으로, 우유에서 락토프리 우유를 거쳐 귀리 우유까지. 참 절절한 사랑이다. 아니, 참 구질구질한 집착이다. 이렇게까지 커피를 마셔야 하나. 쿨하게 안 마시면 되는 건데.
하지만 풍파마다 취향을 포기했다면 나에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현실과 취향 사이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맞춰가며 꾸역꾸역 커피를 마시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넘쳐나도 포기하지 않는 것. 좋아하기 때문에. 행복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조금씩 모이고 모여 나라는 인간이 된다고 믿는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일상 전체의 균형을 지키면서도 어느 정도 타협이 가능하다. 인생의 모 아니면 도가 아니니까. 부디 포기하지 말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이어가겠다는 의지. 취향과 낭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