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빠인 나는 취미에 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금세 화르륵 불타오르고 어느새 파사삭 식으며 각종 취미를 섭렵했다. 나를 스쳐간 수많은 취미들이 우리 집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프랑스 자수에 꽂힌 적이 있었다. 공방에 다니려고 했는데 수강비도 만만치 않고, 수업시간도 잘 맞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마음을 먹었으니 어떻게든 시작해야지. 이럴 때 제일 좋은 게 책이다. 젊은이들은 유튜브면 충분하다지만 아날로그인 나는 잘 정리된 책 한 권이라도 봐야 마음 편히 시작할 수 있다. 책을 읽으니 필요한 재료들이 눈에 보였다. 이왕 시작하는 거 완벽하게 준비해야지. 자수용 바늘, 자수틀, 원단에 화룡점정 200색 자수실 세트까지 주문했다. 색색깔로 가지런히 정리된 자수실을 보니 이미 프랑스 자수를 마스터한 기분이었다.
책과 유튜브를 보며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니 그럴싸한 무언가가 완성되었다. 몇 번 연습을 거친 후 바로 반제품으로 만들어진 파우치와 가방을 주문해 자수를 놓았다. 몇 개는 내가 쓰고 몇 개는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보람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재미와는 상관없이 고개를 숙이고 자수를 놓자니 목이 너무 아팠다. 고질적으로 일자목이 문제인 나에게 자수를 잘 맞는 취미가 아니었다. 심지어 작은 바늘과 얇은 실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눈이 점점 침침해졌다. 가뜩이나 라섹 수술을 한 비싼 눈인데 말이다. 그렇게 한 달도 채 활약하지 못하고 자수 용병대들은 깊은 서랍 속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한 때는 미니어처 집을 만들기도 했다. 크기는 작지만 진짜 목공처럼 나무를 자르고 붙여 집과 가구를 만드는 것이다. 커튼이나 쿠션 같은 소품까지 만들어 꾸며주면 꽤 그럴싸한 집이 완성된다. 그때 쓰던 장비와 작은 목재들, 목공용 접착제, 오일스테인 등도 캄캄한 서랍 속 어딘가에 모셔져 있다. 진짜 목공이 취미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 내 방 한편에는 재봉틀 2대와 각종 원단, 부자재, 그리고 재봉틀 관련 서적이 한쪽 벽을 채우고 있는데 재봉틀을 돌려본지가 언제였더라? 4년은 족히 된 것 같다. 아이가 생기고 나니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취미는 불가능의 영역이 되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한 숨이라도 더 자야지.) 도자기 만들기에 빠진 적도 있는데 공방에 다녀 천만다행으로 우리 집에 가마는 없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준비했으니 그냥 버리기도 아깝고, 그렇다고 중고 거래할 부지런함도 없고, 막상 처분하자니 좋아서 시작한 것들이니 언젠가 다시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발목을 붙잡는다. 한 때는 하고 싶다면 완벽히 준비해 시작하고 마는 실행력에 박수를 보냈는데 소복이 먼지만 쌓여 무용지물이 되어가는 짐덩이들을 보자니 한숨만 나온다. 이 정도면 실행력이 아니라 충동성이 아닐까. 단지 무엇인가 시작(만)하는 나에게 도취되었던 것이 아닐까. 나에게 잘 맞는지, 꾸준히 할 수 있는지 고민하며 천천히 시작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최소한으로 시작해 점점 늘려가는 재미도 좋았을 텐데.
요즘에는 잘 시작하는 것보다 잘 끝내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잘 정리하고,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시작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 시작의 순간에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헤어짐의 순간을 생각해야 한다. 그랬다면 쓰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계륵 같은 물건들을 한가득 쌓지 않고도 나에게 딱 맞는 취미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신속 정확이 아니라 신중 정확하게 시작해야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다. 혹 그렇게 신중을 기하다 놓쳐버린 기회가 생기더라도 이제는 천천히 시작하고 잘 헤어지는 것을 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