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사정

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멀리스트

by paha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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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물건을 가장 좋아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삼색 볼펜 하나도 끝까지 쓰는 사람이다. 검은색을 다 쓰면 파란색, 그다음은 빨간색을 다 써야 새로운 볼펜을 찾는다. 필기도구로 가득 찬 내 책상을 보고 남편은 평생 볼펜은 안 사도 되겠다며 좋아했다. 지금도 내 책상을 뒤지면 볼펜 100개쯤은 거뜬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혼 후 같은 집으로 이사하던 첫날. 끝없이 들어오는 내 짐들을 보고 남편은 깜짝 놀랐다. 남편은 작은 신혼집에 이 짐이 다 들어올 수 있을까 걱정했다. 다행히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신혼집 곳곳에 자리 잡은 내 장난감들이 남편에게 두 번째 충격을 주었지만.


늘 사고 싶은 물건과 그만 사라는 통장의 줄다리기 속에 괴로운 나는 물욕이라고는 없는 남편이 부럽다. 지난 3년 동안 남편이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은 책과 태블릿 pc 뿐이었다. 책은 사서 읽어야 한다가 지론인 남편은 책은 꽤 사지만 다른 것에는 욕심이 없다. 태블릿 pc도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는 명분이 있었다. 내가 책도 찾아 읽고 마음도 다스려가며 번뇌 속에서 실천 중인 미니멀 라이프가 남편에겐 당연한 일들이다.


남편에게 내 소중한 수집품들은 그냥 먼지가 잘 쌓이는, 쓸모없는 것들이다. 남편 기준으로는 터무니없는 가격까지 더해지면 내 장난감들의 가치는 더욱 떨어졌다. 하지만 남편은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비치지 않았다. 요즘엔 나의 장난감 고민까지 진지하게 들어준다.


극 현실주의자와 미니멀리스트인 남편이 맥시멀 리스트와 키덜트인 부인을 만나 함께 살고 있으니 인생은 역시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어떻게 우리가 결혼을 했을까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잘 살고 있다.

미니멀리스트인 남편 덕에 이 좁은 집에서 그나마 내 물건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남편도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마다 내 방을 뒤지면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하니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는 오늘도 상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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