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앵콜요청금지 Jan 30. 2017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진중권

진중권이라는 사람과 그의 행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똑똑하고 지적인 사람이지만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발언과 독설로 세간의 불편한 시선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뭐가 이리 시끄러운가 하고 호기심만 갖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이 책의 출간 예약 소식을 보고 장난스러운 기대 반, 진지한 기대 반으로 구매를 했다.


2017년 1월인 이번 달 초에 출간된 이 책은 진중권이 2013년 비에 젖어 있던 아기 길고양이를 입양하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일명 루비)이라는 이름을 붙여 키우게 된 이후 고양이 덕질을 시작하여, 인문학에 대한 자신의 내공을 쏟아부어 고양이에 관한 역사/문학/철학을 집대성(?)한 책이다. 다량의 사랑과 약간의 농담, 그 와중에 다방면의 깊이 있는 짜투리 인문학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읽으면서 너무너무나 부러웠다. 본인의 재능으로 덕질을 이렇게 훌륭하게 승화시킬 수 있어서.


오해하기 쉽기에 다시 당부하면 절대 길에서 주운 아기고양이를 키워낸 에피소드에 대한 육묘일기가 아니라 고양이에 관한 역사/문학/철학에 대한 책이다. 나도 책 제목만 보고는 뭔 책인가 정체가 궁금했었다. 제목인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명제의 패러디이고, 부제인 '지혜로운 집사가 되기 위한 지침서' 는 T.S.엘리엇의 동시집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패러디 한 것이다. 이 동시집은 뮤지컬 "캣츠"의 대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책은 고양이의 역사학, 문학, 철학 이렇게 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책의 도입부는 루비의 입을 빌려 근대 철학의 '인간중심주의' 를 빗댄 "고양이중심주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말을 안해도 사는데에 지장은 없어. '파블로프의 개'라고 알지? 우리 집사는 간식을 줄 때마다 "간식 먹자"고 말하며 짝짝 박수를 치거든. 그때마다 가서 몸으로 다리를 비벼주는 거야. 그럼 다음부터는 그냥 몸으로 다리만 비벼줘도 조건반사된 집사가 박수를 치고 간식을 갖다 줄 꺼야.
(...)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지 못하고 꼭 '인간화'해버려야 성이 차는 버릇. 그걸 철학에서는 '인간중심주의'라고 하지 아마? 내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게 있다면, 이 인간 종족 특유의 고질병을 극복하자는 거야.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고양이를 대하는 현존재(=인간)의 태도 전환을 요청한다고 할까? 아무튼 대한민국 집사계에 팽배한 이 낡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집사 문화에 새로이 '고양이중심주의'를 확립하는 것. 그게 내가 집사에게 이 책을 받아 적게 만든 목적이야.
- p.6-8

아 책의 도입부부터 파블로프에서 빵 터짐. 가끔 내가 고양이랑 놀아주는 게 아니고, 고양이가 나랑 놀아주는 것 같은 느낌, 야옹 하면 가서 시중 들고, 부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기분 탓이 아니었던 건가.


1장 "고양이의 역사학"에서는 발굴된 고대 유적과 현대 고양이의 유전자 조사, 성경과 신화의 언급 등을 통해 집 고양이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와 서양사 및 한국/일본/중국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고려 문신 이규보(1168~1241)의 시 "검은 고양이 새끼를 얻고서"에는 인간과 고양이의 첫 만남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옛날에는 '냥줍'을 뭐라 불렀을까? 얻을 '득' 자를 써서 득묘아得猫兒? 아니면 주울 '습' 자를 써서 습묘아拾猫兒?
- p.125

냥줍에 대한 국어(한문?)적 고찰. 크핫.


2장 "고양이의 문학" 에서는 오래전부터 고양이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셋째, 고양이는 "생각이 깊고 사색적"이다. 고양이가 철학적 동물이라는 것은, (1) 고양이는 하는 일이 없다 (2) 그런데도 잠이 많다는 두 가지 명백한 사실에서 간단한 추론만으로 쉽게 입증된다. 잠이 많다는 것은 피곤하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하는 일이 없다면, 피곤한 것은 고양이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정신이 피곤하겠는다. 당연히 머리를 혹사시키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아무 일 안 하는 것처럼 보이나 고양이는 속으로 늘 깊은 사색을 하고 있다. 이는 시각적으로도 확인된다. 보라, 고양이는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뭔가 골똘히 생각하며 보낸다.
- p.159

이 진지한 문장이란. ㅋㅋㅋ 사실 고양이는 하는 일 없이 잠만 잔다고 살짝 까고 있음. 실제로 고양이는 하루 평균 24시간 중에 18시간을 잔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집 고양이 솜이는 그럼 그외 6시간을 놀아달라고 보채는 건가. 눈만 뜨면 놀자고 야옹거리고 뛰어다녀서, 글을 쓰는 지금 고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자제 중 .. -ㅁ-


2013년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 한 대학원생이 박사 논문에 쓸 자료를 찾기 위해 국립 문서고를 뒤지다가 우연히 15세기 필사본에서 고양이의 흔적을 발견한다. 필사본 페이지에는 그 위를 밟고 지나간 고양이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 저 페이지 위에 발자국을 찍으려면 먼저 잉크부터 엎어야 한다. 이어 잉크 묻은 발로 녀석은 수사가 공들여 베낀 필사본을 밟았을 것이다. 이를 본 수사가 패닉에 빠져 달려왔을 때는 이미 상황 종료. 이 앙증맞은 사건이 벌어진지 600년이 지났다. 하지만 인간과 고양이의 관계에는 큰 변함이 없는 듯하다. 중세의 고양이가 책 위로 잉크를 엎었다면, 현대의 고양이는 노트북 위로 지그시 캔 커피를 엎을 뿐. 그러니 만국의 집사들이여, 닥치고 경배할지어다. 보라, 저분이 오늘날 키보드-고양이의 원조시니라.
- p.168-169
깨알같은 집사의 주인님 자랑
그렇다면 왜 고양이에 장화를 신긴 것일까? 가장 궁금한 게 이것이었다. 내가 이탈리아 원작, 샤를 페로의 프랑스 버전, 그림 형제의 독일 버전을 모두 구해 비교해가며 읽은 것도 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 p.191

이야기 속에서 고양이가 장화를 신은 이유가 궁금해서 '장화신은 고양이' 에 대한 이탈리아/프랑스/독일 버전까지 구해 비교해 읽다니, 과연 덕질이란 무엇인가.. ㅋ


3장 "고양이의 철학" 에서는 과거 철학자들이 바라본 동물의 정의와 인간에 대한 정의와의 관계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타자-되기의 한 예로서 고양이-되기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고양이는 사회 속에서도 독립성을 유지하는 매력적인 존재로서 그와 더불어 살자는 고양이중심주의를 선언한다.


타인의 사랑을 바라나 굳이 그것을 구걸하지는 않고, 속으로는 따뜻해도 겉으로는 늘 까칠하며, 이기적으로 보이나 실은 그 누구보다 이타적이고, 아무리 친해져도 끝내 어떤 알 수 없는 구석을 남기며, 사회 안에 살면서도 거기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는 존재. 고양이성을 구현한다는 것은 이렇게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고양이 특유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고양이에게 배움으로써 우리는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고양이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이렇게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에서 고양이중심주의felinocentrism로 현 존재의 태도를 단호히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 p.323



빠른 구매로 루비의 발도장과 작가의 친필싸인이 있는 책을 받았다. 얏호.


책의 내용은 사실, 고양이 찬양을 위한 고양이 찬양에 대한 고양이 찬양에 의한 아무말 대잔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게 너무 좋다.


나도 훌륭한 덕질을 해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존감 수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