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국
얼마 전에 읽은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인용된 것을 보고 읽게 된 책이다. 과학이 알려주는 행복이란 뭘까, 궁금해졌다.
최신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행복을 쉽게 설명한 전문가의 책이 있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이다. 그는 미국에서 오래 연구한 심리학자로, 인간이 느끼는 행복에 관하여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인용되는 연구자의 한 사람이다. (.. 중략..) 과학이 알려준 행복은 결국 가족, 연인, 친구, 동료 등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이 핵심이다. 물론 우리 사회의 수직적 가치관과 경쟁 역시 출세, 권력, 돈, 학벌, 지위재의 과시를 통해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본성의 발현일 것이다. 문제는 본말이 전도되어 매개체인 돈, 지위 등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는 점이다.
<개인주의자 선언>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행복론은 철학적 의미에 중점을 두어 논의되어 왔지만 근래 들어 행복의 과학적 의미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를 통해 새롭게 조명받게 된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생물학적 원리'와 '그것이 인간에게 가지는 그 의미' 그리고 '행복을 느끼는데 영향을 준다고 밝혀진 요소'를 이 책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다윈의 주장대로 꼬리는 패션 품목이 아니었다. 수컷의 화려한 꼬리는 자신이 건강하고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존재임을 암컷들에게 과시하는 상징물이다. (.. 중략..) 공작새의 꼬리는 진화론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생명체가 가진 모든 생김새와 습성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생존과 짝짓기를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너무 중요해서 다시 한번 쓴다. 동물의 모든 특성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다. 특히 '모든'이란 단어에 주목하자.
- p.53 '다윈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행복' 중에서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인간이 음식을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얼어붙은 손을 녹일 때 '아 좋아, 행복해'라는 느낌을 경험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또다시 사냥을 나가고,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 p.68 '동전 탐지기로 찾는 행복' 중에서
행복은 이런저런 긍정적인 감정인 쾌감들이 만들어낸 종합적인 현상이고, 이것은 동물적인 본능으로 생존에 유리한 행동을 할 때 발생하는 쾌감을 추구하고, 위험을 방지하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생명체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 이유로 벌, 선인장, 꽃게와 마찬가지로 생존이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이것을 행복과 연결시키면 당연하지 않은 결론이 나온다. 이 새로운 관점으로 보면 행복은 삶의 최종적인 이유도 목적도 아니고, 다만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일 뿐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p.71 '동전 탐지기로 찾는 행복'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인 시각에서는 행복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이자 최종 목표였는데, 다윈의 진화론적 시각에서는 동물로서 인간의 존재 이유는 생존이고 행복은 그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된다. 모든 존재는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목적론적 시점으로는 최종 목표인 행복을 실현하지 못한 삶은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과학적인 사실로서의 행복은 유전자에 새겨진 화학적 작용일 뿐이라니 행복이라는 목표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아 한편으로 안도감이 든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강력한 고통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 중략..) 왜 이토록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할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막대한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바로 생존. 세상에 포식자들이 있는 한, 모든 동물의 생존 확률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을 때 높아진다. - p.82 '결국은 사람이다' 중에서
그리고 인류가 다른 동물보다 성공적으로 지구에서 번창한 이유는 높은 사회성 덕분이며, 인간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쾌감과 위험을 방지하는 고통은 바로 이 사회성을 유도할 때에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관계를 잘 맺고 있을 때 긍정적인 감정이 발생하고, 사회적 고립 상황에서는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외향적인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사실. 심지어 내향적인 사람도 혼자일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더 높은 행복감을 느낀다고... 그리고 지금까지 행복감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행복감에 영향을 주는 유의미한 요소는 그 어떤 외부 요소나 다른 유전자적 기질보다도 단 한 가지, 타고난 외향성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절망적인 결론이다. 난 출세하고 싶은 것도 억만장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저 소소한 행복감을 느끼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유치하지만 진로와 인생의 선택길에서 엄마에게 내가 외쳤던 말,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엄마가 기억하고 계시더라 ㅎㅎ 부끄럽게). 행복감을 잘 느끼는 기질은 타고나는 거라니, 그리고 그것도 외향성이라니 ㅠㅠ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피로감을 잘 느끼는 나로서는 하나도 좋은 소식이 아니다.
행복감의 추구는 유전자에 새겨진 동물적인 본성이니까,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 한 가지 정도? 하지만 그런다 한들 내가 동물적 본성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_- 행복감을 추구하지 않으면 삶이 괴로울 거 아닌가 말이다. 집착에 대한 내려놓음은 마음의 위로 그 이상은 아니다.
천연의 행복은 레몬의 신맛처럼 매우 구체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쾌락적 즐거움이 그 중심에 있다.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것을 뒷전에 두고 행복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p.186 '오컴의 날로 행복을 베다' 중에서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보통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 삶은 마치 어리석고 미련한 일처럼 느껴지는데 (아마도 이것이 목적론적인 시각), 사실 내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일에 꼭 이유가 있는 건 아닐 수 있다는 것. 위대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소소한 행복을 자주 느끼며 사는 삶이어도 좋지 않을까. 난 그냥 그렇게 살려고. 종종 까먹지만, 노력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