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나는 동영상 콘텐츠보다 글자를 좋아하는 구식 인류이다.
유튜브보다는 블로그나 웹페이지에서 정보를 찾고, 영화나 드라마도 좋아하지만 소설책을 읽을 때 더 편안하고 더 짜릿하다. 유튜브에 영화나 드라마 '요약' 콘텐츠가 정보 습득이 아니라 콘텐츠를 즐기는 목적으로 소비되는 게 아직 낯설다. 그래서 너무 궁금했다. 서점에서 발견한 이 책이.
첫 번째로,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영상 작품을, 가장 값싸게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중략) 그래서 수많은 영상을 보려면 그만큼 돈을 들일 각오를 해야 했고, 기껏해야 영화 마니아나 드라마 애호가, 애니메니션 팬 정도만 그만한 돈을 지불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를 이용하면 매달 천 엔 내외의 저렴한 비용으로 '원하는 만큼' 영화를 볼 수 있다.
- p.17
최근에는 상황이나 인물의 감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대사로 설명하는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 (중략) 그런 작품에 익숙해진 시청자는 대사로 주어지는 정보만 이야기 진행과 관련이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들의 논리는 이러하다.
"빨리 감기로 봐도 대사는 들리니까(혹은 자막으로 읽을 수 있으니까) 스토리는 알 수 있어요. 문제가 되지 않죠."
반면에 인물이 등장하지 않거나 침묵이 이어지는 장면은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 건너뛴다. (중략) 어떤 장면에서 남녀가 서로 말없이 응시하면서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분명히 호감이 있다는 묘사다. 그런데 어떤 시청자는 이렇게 반론했단다.
"그런데 누구도 좋아한다는 말을 안 했으니 호감을 아닌 것 같아요. 좋아한다면 직접 말하지 않았을까요?"
트위터에서도 암묵적인 비유, 풍자, 우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주 관찰된다.
-p. 73
'이해하기 쉬운 것'이 대접받는 세상이다. 극단적이고 선정적인 의견을 짧고 시원하게 외치는 사람이 인터넷에서 팔로워를 모으기 쉽다. (중략) 어떤 논점이나 문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이 바삐 오가면 그만큼 소통에 힘이 든다. 즉, 불쾌해진다. 이런 불쾌함을 피하기 위해 빠르게 정답을 알려주는 곳에 사람이 모인다. 영상 작품도 마찬가지다.
-p.76
이야기에 설명이 너무 많으면 시청자는 생각하기를 멈춘다. 다르게 말하면 대사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행간에 숨은 뜻을 읽고 사고하려는 마음이 없다.
-p.78
쉽고 이해하기 편한 지식과 짧고 간결한 전달방식(숏영상 틱톡, 140자 텍스트 트위터)에 사람들이 모인다. 관객들이 누구나 인터넷에 감상을 적기 시작하게 되면서, 흥행에 성공해야 하는 영화 투자사들은 어려운 각본을 꺼려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설명이 많은 콘텐츠에 익숙해진다. 난해한, 여백이 있는 콘텐츠는 더 배제되고 빨리 감기로 재생된다.
왜 그렇게 하면서까지 이슈를 따라가려는 걸까? 대화에 끼는 것이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해진 탓이다. 이를 초래한 것이 바로 SNS에 수시로 접속하는 습관이다. (중략) 소위 말하는 '읽고 씹기'는 '그 화제에 관심이 없다'라는 적극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진다. 화제가 된 작품은 가급적 보고 감상을 말해야 그룹의 평화가 유지된다.
-p.103
내가 가장 궁금한 점이 바로 이 포인트였다. 즐기고 감상할 만큼만 영상을 보면 될 텐데, 왜 빨리 감기까지 하면서 많은 개수를 보고 싶어지는 걸까. 감상 없이 결말만 알고 싶은 수요가 왜 그렇게 많은 걸까.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잘 되었다.
Z세대처럼 인터넷을 많이 사용할수록 '틀리는 것'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한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로부터 엄격하게 비판받거나 비웃음을 사는 참상을 지겹도록 봐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감상도 하기 전에 리뷰 사이트를 읽고 범인을 알아둔다. '정답'을 알고 싶어서. "그들은 빠른 정답만 원한다"라고 젊은이들은 비판하기는 쉽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누구든 상처받기를 꺼린다. 창피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중략) Z세대는 기댈 곳이 필요하다. 개성 있는 존재가 되려면 더 많은 작품을 봐야만 한다. 그들은 이 과정을 '가성비 좋게 해결'하길 원한다. 그래서 "봐야만 하는(읽어야 하는) 중요한 작품을 적어달라"고 한다.
-p.126
현상 분석에 그치지 않고 요즘 세대들이 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다양한 작가의 해석이 이 책에서 특히 좋았다.
*책으로 사서 봤는데, 오늘 검색해보니 리디셀렉트에도 있었다. (더 좋은 e북 서비스가 뭐 있나 싶어서 yes24e북, 교보e북 왔다갔다 하다가 다시 구독서비스 리디셀렉트로 컴백했음. 차이가 크게 안 느껴지는데 제일 익숙함이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