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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Sep 02. 2017

과야킬을 건너 페루 리마로 가는
길고 긴, 긴 길

크루즈 델 수르를 타고 에콰도르와 페루를 건너는 버스 여행

바뇨스에서 반나절을 달려 아침 8시쯤 과야킬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아쉽게도 과야킬 버스 터미널에서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지만, 과야킬의 버스터미널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덕에 기억이 생생하다.

내부 사진은 없지만,  버스 승강장만 봐도 짐작 가능한 과야킬 터미널의 규모.

과야킬 버스터미널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규모가 굉장히 컸다.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버스터미널보다도 훨씬 크고 깔끔했으며 여러 층으로 이뤄져 있어서 거의 김포공항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도... 굉장히 다양한 먹을거리를 팔고 있어서 눈이 돌아갔다. (사실 이 점이 가장 기억에 남고 마음에 든다.)

아주 예쁜 케이크들을 파는 집도 있었고, 요거트나 생과일주스, 패스트푸드점 등등 먹을 게 얼마나 많던지. 한창 배고프던 참이어서 과일스무디와 현지식 패스트푸드(잘은 기억 안나지만 치킨, 계란, 밥, 감자튀김 등등이었던 것 같다)로 배부르게 식사를 했다. 푸드코트에 테이블이 워낙 많아서 밀린 일기들도 좀 쓰고.

이렇게... 바뇨스에서의 힘든 래프팅을 회상하는 괴발개발 그림일기.


여기서 정말 '신이 나를 살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사건 한 가지.

혼자서 터미널 푸드코트 테이블에 앉아서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남미 치안이 워낙 불안하니까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 짐을 훔쳐갈까 싶어서 큰 배낭은 자물쇠를 꺼내서 의자에 줄으로 칭칭 감아 묶어두고, 귀중품 가방을 챙겨서 잠시 테이블을 비우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렇게 시원한 기분으로 룰루랄라 돌아왔는데, 세상에...

내 핸드폰이 떡하니 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 커다란 배낭은 그렇게 철저하게 의자에 꽁꽁 묶어두고 자물쇠까지 꺼낸 주제에 

정말 어이없게도 핸드폰은 아무 생각 없이 테이블에 놔두고 태연하게, 그리고 아주 느긋하게 화장실을 다녀온 것이다.

핸드폰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 

원래 터미널처럼 사람이 바글거리는 곳에, 게다가 빈 테이블에 핸드폰을 두고 자리를 비우면 남미에서는 누군가가 그 사이에 훔쳐가야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자리에 앉자 경비원 혹은 경찰로 보이는 한 여성분이 내게 주의를 준다.

"여기서 이렇게 핸드폰 두고 다니면 안 돼! 위험해. 항상 갖고 다녀야 해."

아무래도 푸드코트 주위를 항상 살피고 계신 이 분이, 내가 핸드폰을 놓고 자리를 비운 걸 발견하고 그 테이블 주위를 계속 지키고 있었나 보다. 


아무튼 나의 덜렁거림을 너무 잘 드러내는 에피소드라 이 이야기는 아직도 가족에게 하지 않았다. 욕먹을까 봐.




얼추 탑승 시간이 다 됐다. 

오늘은 남미에 온 이후로 나의 첫 번째 크루즈 델 수르 버스를 탑승하는 날이다.


아무래도 크루즈 델 수르는 페루의 버스회사이기 때문에, 이처럼 에콰도르 과야킬-페루 리마 등 국경을 가로지르는 노선의 경우 버스가 매일 다니지 않는다. 이 버스표도 일주일에 단 한 번 운행하는데, 난 운이 좋게 일정이 딱 맞아서 이용할 수 있었다. 날짜가 안 맞는 분들은 다른 노선을 택해서 에콰도르에서 페루로 넘어가는 듯했다.


와우, 무려 34시간이라는 버스 탑승시간의 위엄.

표를 확인하기 위해서 터미널의 Cruz del Sur 창구로 향했다. 거기서 버스 안에 실을 커다란 짐가방이나 배낭 등 수화물을 맡기고, 탑승 수속을 한다. 

짜잔!! 

내가 그렇게나 궁금해했던, 나의 첫 번째 크루즈 델 수르 버스.

외관마저 멋있다. 제대로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발은 나의 발.

워낙 장거리 구간인만큼 의자가 크고 개인 좌석 공간이 넓다.

크루즈 델 수르 버스는 구간과 가격에 따라 의자의 종류가 조금씩 다른데, 주로 1층이 더 비싸고 넓은 좌석이며 뒤로 완전히 제껴지는 침대형 좌석(Cama, 까마)이고 2층에 반 정도 몸이 제껴지는 세미까마가 있다. 물론 이것 역시 구간과 버스 종류별로 차이가 있다.

이후 페루에서 여러 차례 크루즈 델 수르 버스를 탔지만, 이 과야킬-리마 구간이 가장 장거리였기에 제일 의자가 크고 넓고 서비스가 쾌적했다.


버스가 출발했다.

작은 스크린 안에서 영화를 골라서 볼 수도 있지만, 금세 질리고 만다. 대부분은 스페인어 더빙이나 자막을 해 놓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도 어렵고. 

콜롬비아에서 탔던 Bolivariano 버스는 와이파이가 됐었는데, 이 버스는 의외로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다. 

최첨단 스마트폰도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기나긴 버스 속 시간. 

몇 시간쯤 달리니 에콰도르-페루 국경이 나온다.

재미있게도 에콰도르 출국 수속과 페루 입국 수속을 하는 곳이 같이 있다. 

한쪽 줄에 서서 먼저 에콰도르 출국 도장을 쾅 찍고 나면, 바로 다음 줄로 넘어가서 페루 입국 도장을 찍으면 된다. 

지루한 시간을 견뎌 버스를 달려오다가 오랜만에 땅을 밟았고, 이젠 리마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버스에서 내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약간은 반가웠던 시간.

다른 승객들도 입국심사를 마무리할 때까지 의자에 앉아 빈둥거린다. 모두 버스로 돌아오니 출발했다. 


이제 나는 페루로 넘어 왔다.


첫 인상이 중요하다.

겨우 0.1초 남짓에 각인되는 '첫 인상' 주제에, 너무나 오랜 시간 타인의 마음 속에 각인되고, 그것이 지워지고 새로운 이미지가 대체되기까지의 시간은 지나칠 정도로 오래 걸리고, 때로는 나에 대한 타인의 편견이 되기도 한다.

이 사진이 페루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다. 버스에서 내다 본 창 밖의 황량한 사막.

창 밖이 온통 끝을 모를 모래사막이었기 때문에 내게 페루의 인상은 어쩐지 예쁘지 않고, 쓸쓸하고, 투박하고, 건조하고, 고달픈 느낌이었다.

물론 페루 여행을 하면서 페루의 다른 면모를 많이 보았지만, 역시 첫인상은 끈질겨서 여전히 나는 페루를 '다른 남미 나라들보다 황량하다'고 회상한다.


"내 첫 인상은 어땠어?" 인턴을 하다가 만난 동료 친구들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사람들 왈, "교포인 줄 알았어.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재외국민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한 여학생 느낌. 어쩐지 옷 입는 거나 자세나 손 제스쳐 느낌이 그랬어."

물론 전부 땡이다. (이젠 그들도 내가 실제로는 어떤지 알고 있고.)

크루즈 델 수르에서 맞이한 첫 끼. 저녁식사다.

티켓을 살 때 보통은 저녁 식사 메뉴도 함께 체크를 한다. 물론 선택지가 많지 않다.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채식 정도. 아마 내가 소고기를 골랐었나보다.


과학적으로도 '비행기에서 먹는 기내식은 땅에서 먹는 밥보다 맛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나. 

비슷한 이유에선지 크루즈 델 수르에서 먹는 밥은 입에 많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지금 보아도 맛이 없는 비주얼이긴 하다만.

특히 저 정체모를 푸딩과 파스타샐러드는 맛이 없다. 한국이었으면 기내식에 당연히 채소 반찬이 많았을 텐데, 남미 사람들이 푸릇푸릇하고 신선한 채소는 잘 즐겨먹지 않는 것 같아서 서러웠다. 오로지 고기와 탄수화물.


바깥 풍경이 사막이다 보니, 밥에서도 사막의 모래알갱이 맛이 나는 듯했다. 

웬만하면 좋아하는 종류로 간식을 챙겨가시길. 나는 바보같이 아무 것도 챙겨가지 않았다. 

계속 사막.

어떻게 이 사막 한 가운데 도로를 냈을까?

그 인부들은 몇 명이고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내가 황량하거나 험준한 곳에 있는 도로나 교량, 건축물들을 보면서 항상 갖는 단골 궁금증이다. 

사막이 있는가 하면, 뜬금없이 사막의 모래언덕 너머로 바닷가가 있다.

차 안에서 사색에 잠겨 일기를 써 보겠노라, 하고 탑승 전에는 야심차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쉽지 않다. 

버스가 계속 흔들리니까 글씨를 쓰기도 좋지 않고, 괜히 멀미할까 봐 몸을 사리게 된다. 


와이파이도 안 된다. 영화도 볼 게 없다. 글을 쓰기도 그렇다. 버스에서 내릴 수도 없다.

무료한 버스 여행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거나, 아니면 역시 의자를 뒤로 푹 제끼고 실컷 잠을 자는 것뿐. 

황량하면서도 참 신기한, 적응 안 되는 풍경이란 말이야.

바다+모래사막+바위의 콜라보.


참, 크루즈 델 수르의 스크린 속에는 영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찾아보니 여러 종류의 책도 있었다. 

그 중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이 눈에 띄어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곧 관뒀다. 버스가 흔들거려서 눈도 피곤하고, 스페인어도 잘 못하면서 무슨 허세인가 싶어서.

남미를 떠나기 전에 동네 도서관에서 네루다의 시집을 빌려 읽고 오긴 했지만. 

버스의 창가가 전부 까만 필름으로 코팅이 되어 있는데, 내가 앉은 창가에 단 하나의 자그마한 필름 빵꾸가 있었다.

여기로 보니깐 세상이 조금 더 밝구나. 

필름을 통해서 보니까 하늘이 마냥 어두운 보랏빛인 줄만 알았는데, 하늘이 생각보단 밝았구나. 


리마에 예상 도착 시간은 저녁 여섯 시였지만, 수도 리마에 오니 역시 길가에 차가 많이 막혀서 8시쯤 되어서야 Javier Prado 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선 택시를 타고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가달라고 했다. 숙소 이름은 Casa Hualpa B&B.

리마에서는 딱 하룻밤만 자고 곧바로 다음날 와라즈로 이동할 것이기 때문에, 숙소 위치는 오직 Javier Prado 크루즈델수르 터미널로부터의 거리만 고려했다. 하룻밤 US달러 11이라는 착한 가격에 나름대로 깨끗하고 쾌적하고 괜찮았다. 리마를 조금 더 여행하려는 사람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리마에 머무는 시간은 단 하룻밤, 리마에서 내가 할 일은 오직 하나.

바로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는 일이었다.


유희열, 이적, 윤상이 나오는 <꽃보다 청춘-페루편>을 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리마에서 3인방이 샌드위치 가게 앞에서 줄을 서서 샌드위치를 사 들고, 크루즈델수르 버스 안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정말 맛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

그 샌드위치 집이 바로 위 지도에 표시된 La Lucha Sangucheria인데, 블로그 검색 결과 El Enano라는 샌드위치 집이 새롭게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고, 감사하게도 내 숙소에서 겨우 두세 블록 떨어져 있었다. 

주저할 것 없이, 체크인을 하자마자 샌드위치 먹으러 고고. 

(구글 검색으로 퍼온 이미지입니다)

짜잔, 줄서기와 기다림 끝에 얻은 나의 샌드위치.

샌드위치 메뉴는 토핑별로 굉장히 다양하다. 샌드위치뿐만 아니라 햄버거나 토스트류도 있고, 과일주스도 다양하다.

샌드위치 안에는 자그마한 감자튀김, 치즈, 햄, 소시지 등이 들어있는데

으음... 엄청 느끼하고 짭짤하다. 

채소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이 먹고 있는 샌드위치도 마찬가지다. 왜 다들 채소를 안 먹는 걸까. 더 신기한 건 여기다가 감자튀김까지 시켜서 같이 곁들여 먹는다는 것. 

아무튼 계속 생각나는 맛은 아닌 걸로. 


숙소에 돌아와서는 바로 샤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은 와라즈로 향하는 긴 여정이 또다시 시작할 테니. 


한 번 집을 떠나와서 머나먼 여행지에 왔으면, 마음 같아서는 모든 도시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둘러보고 싶지만 무한한 예산과 무한한 시간이 있지 않은 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이 여행에서 목표한 것에 따라 우선순위를 나누다 보니 리마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리마도 자세히 둘러봤으면 아름다운 도시였으려나? 아쉬움이 남긴 한다.


아쉽지만 리마는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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