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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Dec 19. 2017

빈털터리가 되다, 그 후

여행의 속도를 되찾기까지 꽤 많은 희생이 따랐다

 내가 칠레 깔라마 버스터미널에서 여권과 지갑 (뿐만 아니라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는 멀티콘센트, 샤오미 보조배터리, 소중한 다이어리, 떠나기 전 인천공항에서 산 입생로랑 틴트, 선글라스 등등도 함께 들어 있었다)을 도둑맞았다는 이야기는 이전 글에서도 다룬 적이 있었다.


 언젠가 여행기를 쓰다 보면 그 이후의 이야기도 써야 할 날이 올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나는 그 날을 계속 미루고 미루게 됐다. 그 사건 이후 여행 일정이 워낙 많이 꼬여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남미가 위험한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심 항상 나만은 아무 일 없기를 바랐고, 모든 일정이 돌발 변수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길 바라고 있었나보다. 나도 이 도난 사건 이후로, "내가 이렇게나 순진하게 여행이 전부 내 뜻대로 되길 바라고 있었구나", 혹은 "내가 이렇게까지 통제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나" 하고 느꼈다. 그 이후로 대략 일주일은, 내가 그토록 한국에서부터 바라왔던 여행 일정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상황을 겪으며 마음 속에서 누구한테도 풀 수 없는 분노가 들끓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남미는 자주 올 수 있는 곳이 아닌, 어쩌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장소였으니까. 


 아무튼 최대한 간략하게 다시 한 번 도난 사건을 설명하자면

 볼리비아 우유니에서 새벽 네시, 칠레 국경을 넘는 복닥복닥하고 매우 열악한 Cruz del Norte 버스를 탐. 버스 안과 출입국 심사대에서 하도 시달려서 그런지 혼이 쏙 빠졌고, 칠레 깔라마 버스터미널에서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에 순식간에 전재산을 털림. 그 때 나와 함께 아타카마로 이동하던 프랑스 청년 토마스가 멋지게 나타나 하루 종일 나를 도와줌. 그리고 그 다음 날 나는 아타카마는 구경도 못하고 여권을 재발급받는 것이 급선무이므로 바로 칠레 산티아고로 내려가는 버스를 탐. 


 다비드가 고맙게도, 나의 도난 대참사 소식을 듣고서는 자기의 지인들을 수소문해 주었다. 다비드는 원래 태권도 선수였기 때문에, 콜롬비아뿐만 아니라 남미 전역에 태권도 관련 인맥이 많았다. 참 다행이고 고맙게도, 다비드의 절친한 친구 마테오가 칠레 산티아고에서 태권도 선생님을 하고 있는 칠레인 부부에게 내 사정을 설명해주었고, 이들은 고맙게도 선뜻 세 번의 밤 동안 나를 그들의 집에 받아주었다. 

 이들 부부의 이름은 Carola와 Huaira.

 남미에서 느낀 남미 사람과 한국 사람의 차이점이 바로 이런 점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을 선뜻 며칠 재워주겠다는 결심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군다나 에어비앤비처럼 숙박비를 받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공짜로 재워주는 것 말이다. 그러나 남미에는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참 많았고, 그만큼 서로가 그런 부탁을 하는 것도 더 쉬워 보였다. 영화에서 흔히 듣던 대사, "Mi casa es tu casa(나의 집은 곧 당신의 집)"의 현실판을 몸소 겪고 있는 셈이었다. 


 칠레 산티아고의 첫 인상은 굉장히 세련됐단 느낌이었다. 확실히 그 전에 봐 온 투박하고 개발이 덜 된 남미의 나라들과는 느낌이 달라서, 심지어는 몇 해 전 갔던 멜버른이 떠올랐을 정도. 

 칠레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까롤라의 집으로 갔다. 까롤라의 집은 아주 한적하고 고요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산티아고의 아파트들은 우리나라의 아파트들처럼 비슷한 모양으로 여러 동이 모여 있는 '단지'로 되어 있지 않고, 딱 하나의 개별 건물만 짓는 듯했다.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까롤라 부부의 집에서 가장 크게 눈에 띈 것은 다름아닌 태극기. 역시 태권도를 하는 부부 답다. 

 부부의 취향을 알 수 있는 독특한 침실. 이 곳은 내가 묵게 된 방인데, 아마도 남편인 Huaira가 대단한 헤비메탈 팬인 것 같았다. 무하마드 알리가 그려진 핀볼 머신까지 있다. 그 한 켠을 차지한, 국기원에서 발급한 태권도 단증까지. 나는 왠지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이렇게 열렬한 '덕질'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더라. 

 또 다른 방. 종종 이 집에는 학생들이 태권도를 배우러 오기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매트와 거울이 있다. 


 "배고프지?" 카롤라가 나를 보면서 물었다. 그렇다고, 정말 정말 배가 고프다고 물었는데, 나를 한참 딱하게 쳐다보던 와이라가 "그 전에 씻고 싶지 않아?"라고 물었다. 응? 왜지? 당연히 24시간 정도 산티아고까지 장거리 버스를 타고 왔으니 씻으면 좋긴 하겠지만 그보다는 배가 엄청나게 고픈데. 밥부터 먹겠다고 대답하고선 오랜만에 나는 그들과 식사 다운 식사를 즐겼다. 

 그리고 나서 욕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보는데... 세상에. 왜 와이라가 '씻고 싶지 않냐'고 물었는지 단번에 알겠다. 내 눈에 대왕 눈곱이 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대충 식사를 하고 나서 대사관에 곧장 찾아가기로 한다. 

+) 여기서 또 하나의 대박 스토리가 있다. 까롤라는 자신이 주칠레 한국 외교관과 친하다면서 내게 외교관을 직접 페이스북으로 연결해주었다. 그리고 그 외교관은 나와 같은 연세대학교 동문이라면서 참으로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딱, 내가 한국에 돌아온 어느 날 뉴스에서 그 사람이 칠레 미성년자를 상습적으로 추행한 바로 그 외교관이라는 걸 보기 전 까지는... 그 뉴스를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떨어뜨렸다.

 참으로 스펙타클한 나의 여행. 

대사관을 찾아가는 건 처음이었다. 주칠레 대한민국 대사관은 산티아고의 경제/금융 중심지구에 위치하고 있다. 

아담한 영사민원실. 대사관 직원들이 참 친절하게 도와주셨다. 

칠레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을 예정이므로, 정식 전자여권은 아르헨티나에 가서 받고 일단 이 곳에서는 임시 여권만 받기로 한다. 

 도난 사건 중에서 지갑/여권 도난만큼이나 열이 받는 건, 내가 그렇게나 아끼던, 그 동안의 여행 일기가 가득한 내 몰스킨 다이어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아쉬운 대로 문구점에 들어가서 예쁜 팅커벨 펜과 새 다이어리를 샀지만, 아쉽게도 절대 몰스킨 다이어리를 쓸 때의 느낌과는 같을 수 없었다. 

 그 문제의 칠레 외교관 아저씨와 처음 타 본 산티아고의 지하철. 그 동안 다른 남미 나라에서 대중교통 안에서 버스킹하는 모습을 본 적은 있지만, 대부분이 눈 뜨고 보기 있기 민망한 수준의 장기자랑인지라 칠레에서의 이 버스킹이 내게는 남미 

최초의 고퀄리티 버스킹이었다. 뛰어난 악기 연주와 보컬 때문에 귀가 즐거웠다. 

저 마이크를 들고 있는 여성분이 노래를 참 잘 부르신다. 

 그 문제의 칠레 외교관 아저씨가 사준 한국음식. 그러니까 지금 이 사진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 뉴스를 통해 얼굴이 떠들썩하게 알려진 바로 그 유명인(?)이다. 이걸 올려야하나 말아야하나 조금은 고민했지만 일단 오랜만에 맛보는 제대로 된 순두부찌개의 맛은 아주 기가 막혔기 때문에, 게다가 이런 유명인(?)을 만나서 친분을 쌓는다는 게 누구한테나 일어나는 흔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아무튼 그렇게 칠레 산티아고에서의 짧고 아쉬운 나날들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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