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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Aug 10. 2022

어느 날 핸드폰 문자로 죽음이 왔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무대 위 작품들





사촌동생 우진이가 죽었다. 우진이의 죽음은 엄마의 문자 한 통으로 전해졌다.  

혈압과 당뇨가 심해 투석도 하고 약을 달고 살았는데 급성 뇌출혈로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쓰러졌다고 한다.

9시간 만에 수술을 했지만 소용없었다고 했다. 연명치료를 하겠느냐는 의사의 말에

삼촌과 숙모는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진이는 세상을 떠났다. 

새해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다음 날 8일에는 화재현장에서 젊은 소방관 3명이 사망을 했다.

4일에는 택배기사가 미끄러지는 차를 막으려다 차 사이에 끼여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365일, 24시간, 60초, 아니 매 순간 지구 어딘가에는 사람이 죽는다. 사람이 죽는 일이 놀라울 일도 아니다. 그 많은 죽음 가운데 내가 아는 죽음이 등장하는 순간, 죽음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인식하지 못했던 죽음을 내 눈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빈소도 마련하지 않고 발인만 치른다는 연락에 병원으로 향했다.

삼촌은 화장을 하지 않겠다 하셨다. 가루가 되어 여기저기 날리는 것은 못 보겠다고 고향 선산에 묻겠다고 하셨다. 가서 잘 지내라고, 자신도 곧 갈 테니까 그때 만나자고도 하셨다. 십여 명 참석한 가족과 친지들에게 가족끼리 자주 연락하며 살라고 하셨다.


어린 시절 동생처럼 가까웠던 우진이의 죽음은 생각보다 큰 슬픔이었다.

자식의 뼛가루가 혹여나 날아다닐까 봐 선산에 온전히 묻어주겠다는 삼촌을 보며

죽은 아이의 옷이라도, 뼛조각이라도, 그것도 안되면 물건 하나라도 찾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팽목항에서 떠나지 못했던 엄마들의 마음을 그제야 조금 알 수 있었다.

화마로 죽은 자식의 시신이 얼마나 그 부모의 마음을 태웠을지,

으스러진 자식의 뼈마다가 얼마나 그 부모의 심장을 녹였을지가.


그 많은 죽음들을 막연한 슬픔으로 기억했었다. 한 번도 제대로 그 슬픔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우진이의 죽음을 지켜보고서야 이기적 이게도 자식을 털끝도 다치지 않게 고이 묻어주지 못하는 그 고통스러운 아픔을 아주 조금 알 수 있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말과 같다. 삼십 대에 나는 아빠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았다. 사십 대에는 파킨슨병으로 긴 투병생활을 하신 외할머니의 죽음을 겪었다. 물론 그 사이사이 친구 어머니의 죽음, 친구의 죽음, 선배의 죽음, 후배의 죽음, 나와 연이 깊은 이의 죽음,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죽음까지 많은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 예상하고 있었을까?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무척 이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 수 없는 우리에게 죽음은 뜬금없이 날아온 돌멩이 같을 수 있다.  혹시 오늘 죽을 사람들의 목록을 들고 망자를 데려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영화 같은 우연이 겹쳐 죽을 사람의 목록을 내가 갖게 된다면? 그 목록 속에 내 이름이 있다면? 나는 죽음을 진짜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죽을 운명의 이름들이 적힌 '데스노트'가 상상이 아닌 이야기가 되어 그 답을 보여준다. '데스노트'를 갖게 된 인간은 선택은 어땠을까? 뮤지컬 '데스노트'는 죽음을 손안에 넣은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살아생전 선을 행하지 못한 인간들의 억울한 죽음(?)은 더 가관이다. 웹툰 '신과 함께'가 지면을 나와 무대 위로 옮겨진 뮤지컬 '신과 함께'는 선하게 살지 않은 인간들의 처참한 말로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죽을 것을 미리 안다면 밀린 숙제 하듯 '선'을 실천해 보기라도 할 텐데 말이다. 미처 '선'을 적립하지 못한 인간이나 죽을 순서가 아닌데도 죽게 된 인간 모두 한 맺힌 원혼이 저승으로 가기는 힘들어 보인다. 햄릿의 아버지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햄릿에게 알리기 위해 이승을 떠돌고 있는 연극 '햄릿'을 보면 억울한 죽음은 복수라는 예리한 칼날이 되어 모두를 전멸시키고야 만다. 


어떤 죽음이 되었건 죽음은 죽은 자에게나 산 자에게 모두 무거운 짐을 남긴다. 죽기에 아까운 사람이 없듯, 죽기에 아까운 나이란 없지만 마흔은 죽기에는 너무 이른 것도 사실이다. 우진이의 죽음이 다른 죽음보다 더 현실로 다가온 것은 지인 중 나보다 어린 사람의 첫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그 미세한 경계선, 우리 모두 그 미세한 경계선 이쪽과 저쪽에 서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 생존이 현실이듯 우진이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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