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이야기하는 무대 위 작품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말과 같다. 삼십 대에 나는 아빠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았다. 사십 대에는 파킨슨병으로 긴 투병생활을 하신 외할머니의 죽음을 겪었다. 물론 그 사이사이 친구 어머니의 죽음, 친구의 죽음, 선배의 죽음, 후배의 죽음, 나와 연이 깊은 이의 죽음,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죽음까지 많은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 예상하고 있었을까?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무척 이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 수 없는 우리에게 죽음은 뜬금없이 날아온 돌멩이 같을 수 있다. 혹시 오늘 죽을 사람들의 목록을 들고 망자를 데려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영화 같은 우연이 겹쳐 죽을 사람의 목록을 내가 갖게 된다면? 그 목록 속에 내 이름이 있다면? 나는 죽음을 진짜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죽을 운명의 이름들이 적힌 '데스노트'가 상상이 아닌 이야기가 되어 그 답을 보여준다. '데스노트'를 갖게 된 인간은 선택은 어땠을까? 뮤지컬 '데스노트'는 죽음을 손안에 넣은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살아생전 선을 행하지 못한 인간들의 억울한 죽음(?)은 더 가관이다. 웹툰 '신과 함께'가 지면을 나와 무대 위로 옮겨진 뮤지컬 '신과 함께'는 선하게 살지 않은 인간들의 처참한 말로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죽을 것을 미리 안다면 밀린 숙제 하듯 '선'을 실천해 보기라도 할 텐데 말이다. 미처 '선'을 적립하지 못한 인간이나 죽을 순서가 아닌데도 죽게 된 인간 모두 한 맺힌 원혼이 저승으로 가기는 힘들어 보인다. 햄릿의 아버지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햄릿에게 알리기 위해 이승을 떠돌고 있는 연극 '햄릿'을 보면 억울한 죽음은 복수라는 예리한 칼날이 되어 모두를 전멸시키고야 만다.
어떤 죽음이 되었건 죽음은 죽은 자에게나 산 자에게 모두 무거운 짐을 남긴다. 죽기에 아까운 사람이 없듯, 죽기에 아까운 나이란 없지만 마흔은 죽기에는 너무 이른 것도 사실이다. 우진이의 죽음이 다른 죽음보다 더 현실로 다가온 것은 지인 중 나보다 어린 사람의 첫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그 미세한 경계선, 우리 모두 그 미세한 경계선 이쪽과 저쪽에 서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 생존이 현실이듯 우진이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