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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Aug 22. 2023

등나무 아래서 쓰는 편지



등나무가 꽃을 피웠다. 포도송이처럼 드리운 보랏빛 꽃을 보면 왜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까? 그것은 아마도 나와 한동안 갈등하다가 화해한 우리의 모습이 등나무를 닮았기 때문 일거야. 지금도 내 서랍에는 네가 쓴 편지가 들어 있다. 썩 감동적인 글은 아니지만, 글 속에 담긴 너의 마음이 가슴에 다가와 오랫동안 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단다.

너에게 고백할게. 학반 배정을 받으려고 서성이는 너를 고깝게 바라본 사실을. 전학생은 보통 두 부류가 있거든. 학교폭력에 얽혀 내쫓기거나 피신하듯 오는 경우와 거주지 이전으로 인한 경우 말이야. 그런데 학기 중에 오는 전학생은 대부분 전자에 해당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 이런 아이들의 담임은 공들여 다듬은 학급 분위기를 흐려 놓지 않을까 염려하기 마련이지. 네가 우리 반에 배정되었을 때도 그랬으니까.

널 처음 만난 날. 지방으로 내려온 이유가 무어냐고 물었을 때 너는 비교적 공손하게 대답했지. 야구부 생활을 하다가 오른쪽 다리 인대를 다쳤고,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수 없어서 공부하기로 맘먹었다고 했잖아. 그 당시 우리 학교 교기가 야구부였던 거 기억하지? 너는 수업 시간에도 운동장 쪽을 수시로 훔쳐보더구나. 야구부원의 방망이 휘두르는 동작을 따라하다가 똑바로 앉으라는 지적을 받으면 시무룩해지곤 했었지. 그런 너의 모습이 얼마나 가엾었는지 몰라. 초등학교 때부터 키운 꿈을 접은 너는 날개 잃은 나비 같았으니까.

분명한 것은 네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거야. 한두 번 등교시간을 어기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대놓고 단골지각생이 되어 버렸어. 하루는 아이들 몇이 함께 지각을 해서 화를 냈는데 죄송하다고 한 것은 지각을 밥 먹듯 하는 네가 아니고 어쩌다 늦게 온 아이였어.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너를 깨우면 불손한 표정을 지었고 교복에서 담배 냄새가 조금씩 나기도 했어. 넌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그날의 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

오후 수업은 졸음에 빠진 아이들과 깨우려는 교사의 힘겨루기 시간이지. 밤늦도록 이 학원 저 과외로 휘둘린 너희들의 고달픔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쩌겠니. 잠과 사투를 벌이는 너희들 깨우기에 지친 나는 궁여지책으로 이런 말도 했는데 기억나니? 졸음을 참는 것은 예의를 지키려는 노력이므로 용서되지만, 대놓고 엎드려 자는 것은 교사를 무시하는 행동이므로 혼나야 한다고. 틈만 나면 자는 모습에 부화가 나서 학교에 숙박비를 내라는 말로 호통 치기도 했지.

참 슬픈 이야기지만 어떤 아이는 차라리 잠 자 주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었어. 그게 너라는 사실. 안 자면 쓸데없이 주변 친구들까지 공부를 못하도록 훼방 놓거나 거슬리는 행동을 하니까. 예를 들면 이런 거 있잖아. 한쪽 다리를 통로에 내놓고 떠는 것. 책걸상을 밀고 당기며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주의력결핍 증세 같은 것.

그날, 출석을 부르는데 너는 이미 책상과 한 몸이 되었더구나. 또 게임을 하느라 밤을 꼴딱 새운 게 분명해. 침을 흘려서 책은 살짝 젖었고 새근새근 코골이까지 하는 거야. 가볍게 등을 쓰다듬으면 못 이긴 척 일어날 줄 알았는데 허리를 반 쯤 일으키더니 가자미눈으로 나를 째려보는 거야. 수업을 마치면 조용히 가르칠 생각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서 교실 뒤편에 서 있으라고 했지. 그런데 너는 교실 바닥에 가래침을 탁 뱉으며 이렇게 말했어. 맘 잡고 학교 좀 다니려 했더니 담탱이 등살에 못 살겠네. 담탱이는 은어로 담임을 뜻하는 거라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어. 이 기막힌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인(忍)자를 심장에 새기며 말없이 너를 향해 걸어갔지. 나머지 아이들은 얼음땡 놀이라도 하듯 꽁꽁 얼어 있었고 침착하자는 나의 속다짐을 무참히 짓밟는 또 다른 장면이 펼쳐졌어.

네가 뒷문을 열어젖히며 막무가내로 교실을 나가 버리는 거야. 그것도 문을 두세 번 발길질까지 하면서 말이야. 시간이 정지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하얗게 질렸던 머리가 온기를 되찾자 분노에 치가 떨렸어. 그냥 학생부로 넘겨 버릴까 생각도 했지. 그리고 너의 빈 자리를 보며 무력감을 느껴야 했단다. 솔직히 네가 학교로 돌아오지 않아도 누구 하나 아쉬워 할 사람은 없었어. 그동안 너로 인해 많이 힘들었으니까.

너를 교실에 뿌리내리게 하려고 공을 들였는데 그런 일이 생기고 말았지. 내가 권위적이지 않아서 좋다고 그랬던가. 아무리 편안한 선생님이라도 교실을 박차고 나간 학생을 그냥 둘 수는 없잖아. 너의 행동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라서 학교 담장을 넘다 들켰을 때, 슬쩍 눈감아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거든.

한 시간 뒤에 돌아온 너는 어설프게 사과했단다. 나는 잘못을 조목조목 되짚으며 그런 너를 내버려 둘 수 없는 이유를 말했지. 내 말이 지루한 설교처럼 들렸던지 영혼 없이 알았다고 하는 너에게 또 화를 내고 말았어. 내 가슴을 답답하게 한 것은 바로 너의 그 무성의한 태도 때문이었어. 꽉 다물고 있던 아랫입술 삐쭉 내밀며 무어라 혼잣말로 옹알이를 하는데 묻고 싶지도 않더구나. 내 가슴에 남은 건 슬픔과 허탈함, 자괴감 같은 것이었지. 그동안 너에게 아무것도 가르친 게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니까.

그때 옆자리의 김 선생은 명백한 교권 침해이므로 선도관리 위원회에 회부시키고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며 펄펄 뛰었지.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야. 그래야 다른 아이들에게도 타산지석이 될 테니까. 그런데 차마 그럴 수가 없더라. 네가 전학 온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거든. 감독에게 인정받던 넌 야구를 못하게 되자 거리의 패거리들과 어울렸지. 경찰까지 수사에 나선 학교폭력에서 너는 주동자였고 피해자 측의 합의조건에 의해 쫓겨 온 거였지. 내가 너를 내치면 또 거리의 아이가 될 게 뻔했거든.

다시 학교에 다니게 해달라고 부모와 함께 온 날, 너는 나와 수학 교사 김 선생 자리 사이의 비좁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지. 너 이번이 몇 번째냐? 너의 입장에서는 잦은 교사와의 갈등을 나무라는 꾸중으로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뜻은 아니었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눈길을 내렸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너의 검은 눈동자에 어린 간절함. 나는 경위서나 각서를 쓰라고 하는 대신 너로 인해 많이 힘들지만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스승이 되고 싶다고 했었지. 네가 졸업장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담임이 되고 싶다고.

종례 후 복도에서 네가 한 통의 편지를 내밀었지. 편지에는 지난 번 교실에서 보인 행동을 반성한다. 야구를 못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한심하고 짜증만 났다. 운명으로 여기자 싶다가도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다. 특히 수학 시간에는 내가 너무 한심하다. 하나도 아는 게 없으니 바보가 따로 없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시 기회를 주신 선생님을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겠다. 나도 나 자신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를 악물고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때부터 간혹 졸기는 했지만 잠들지 않으려 애쓰고, 수업에 귀 기울이려 노력했다는 거야. 나는 그것이 그저 반갑고 고마울 뿐이었다. 그리고 죄는 밉지만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지. 어디 그뿐이니? 어느 날, 문학 시간에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를 읽어주는데 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야. 그 모습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몰라. 넌 그렇게 익어가고 있었던 거란다.

너의 눈빛이 편안해 보이는 것도 자신을 인정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렇지 싶더구나. 정말 고마운 것은 나의 용서에 대한 너의 화답이란다. 만약 너의 대답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허탈했을까. 용서라는 이름으로 너를 거두려 했던 나는 얼마나 비참했을까. 느리지만 달라지고 있는 너의 모습을 보면서 등나무 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흰색과 분홍, 옅은 보라에서 짙은 보라색의 그라데이션이 차츰 깊어가는 너의 성숙을 닮은 듯 했으니까. 꼭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담임이라는 씨실과 학생이라는 날실로 만난 너와 나. 그때 우리는 용서와 성숙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하여 서로 부대끼며 상처를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뒤틀리는 몸통으로 인해 나보다 더 아리고 쓰라린 아픔을 겪었을 너. 네 마음에 옹이가 불거지는 고통보다는 너로 인해 생긴 상처에 아파했던 나. 등나무 가지가 서로 엉겨 붙어 하나의 줄기를 만들 때는 서로의 몸에 상처를 만들며 자라 올라간단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아팠나 보다. 덩굴손을 뻗은 등나무 아래에서 찬란한 보랏빛 향기를 담아 너에게 띄운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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