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울 Aug 22. 2023

포토시를 쓰는 아이들


포토시 수업을 했다. 포토시 수업은 사진과 시(詩)가 만나는 수업이다. 빡빡한 학교생활에 눌려 봄이 왔는지 가을이 가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숨통을 틔워 주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수업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핸드폰만 챙겨서 운동장으로 나가 마음에 다가오는 풍경을 찍고 그곳에 무어라도 좋으니 적어 보라고하면 되는 수업이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햇살을 맞으며 바람을 맛보라고 하면서 음유시인 시늉을 한다.

벌써 계절이 두 개 반쯤 지나갔네요. 여러분은 하늘을 얼마나 자주 보나요? 은행잎이 노란 비가 되어 흩날리는 모습에서 어떤 느낌이 드나요? 햇볕을 아낌없이 받고 있는 저 운동장을 걸어 다녀보아요. 아니면 담쟁이 넝쿨의 맨몸에 가만히 손을 대고 물어보세요.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으면서 여러분의 힘들고 지친 이야기를 담아도 좋고 행복한 마음을 써도 좋습니다. 그냥 솔직하고 자유롭게, 그렇지만 이 시간엔 자신이 시인이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교실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운지 폴짝폴짝 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수행평가에 들어가느냐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어오는 아이도 있다. 무엇이 즐거운지 깔깔대며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아이들 틈으로 귀찮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도 있다.

그런 아이들도 오 분을 채우지 못하고 무언가를 열심히 찍기 시작한다. 요리조리 각도를 잡는다든지 경치를 줌인으로 당겨보는 자세가 진지하다. 이때 ‘우와’ 내지는 ‘최고’라는 말을 외치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적당히 시간을 보아서 이제 네 안의 너를 표현할 시간이라고 하면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쓰기 시작한다. 간혹 마음표현에 서투른 아이에게 슬며시 다가서면 저도 쑥스러운지 빙긋 웃는다.

자연과의 소통 내지는 삶에 대한 성찰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아이들의 포토시를 감상하다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체육 시간에 골프를 배웁니다./잔디가 깔린 운동장에 서서/누가 더 멀리 공을 보낼까/저 너머를 쳐다보다가 저 너머로/뛰어갑니다. 공을 주우러//공 옆에 민들레가 앙증맞게 피어 있습니다./얼마나 밟히고 무시당했는지 참/키 작은 꽃입니다./나는 공을 주우러 허리를 숙이고 공부하려고 고개를 숙이고/아래만 보며 살았습니다.// 키 작은 민들레는 꼿꼿하게 서서 하늘을 바라봅니다./나도 민들레를 따라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구석진 곳에 핀 작은 민들레가/자꾸만 작아지려는 나를/꾸짖는 것일까요.

게임에 빠져서 오전은 비몽사몽이고 야간 자율학습도 말없이 빠지는 게 다반사인 아이가 쓴 글이다. 무엇을 묻든 늘 모르겠다는 말만 해서, 도대체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냐며 호통 쳐도 손톱만 뜯었다. 담임과의 다짐을 작심삼일로 무참히 깨버리는 아이가 이런 글을 쓰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교육은 기다림으로 희망을 만드는 길고도 먼 여정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물론 이런 글을 썼다고 해서 행동이 당장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힘이 있으면 언젠가는 되돌아오게 된다.

장단지가 아프도록 쪼그리고 앉아 낙엽과 마주한다. 할머니 손등 같은 잎맥에서 허물어지지 않을 추억이 꿈틀댄다.// 내일을 위해 깊은 잠에 빠진 시골 밤. 고요한 바람에 스치며 풀벌레 소리가 우렁차다. 이 밤이 자나면 개는 일어나 마당을 지키고, 구멍가게 아저씨는 문을 열겠지. 할머니도 어제처럼 떡집 문을 여신다. 떡을 고르는 사람들의 요란한 소리에 할머니는 이 떡 저 떡 맛보라며 썰어 내신다. 턱을 괴고 바라보던 나에겐 달콤한 식혜를 내어주신다. 할머니 앞에서 내 이름은 똥강아지.// 할머니는 소풍가듯 떠나셨지만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추억의 집 한 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가정불화 때문에 수시로 엇나가는 아이가 쓴 글이다. 이런 추억의 집 한 채를 가진 아이도 겉보기에는 교실의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으로 판단해 버렸던 내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살갑게 물어도 ‘예, 아니오.’로 대답하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니 아픔의 깊이를 몰랐다. 그저 교실이라는 울타리를 지켜내기 급급해서 양치기 개처럼 짖어댔다. 나만 열심히 하면 이이들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자기 최면에 빠져 있었던 건 아닐까. 일탈 행동을 일삼는 이 아이에게 필요한 건 사랑과 믿음인데 말이다.

옹이진 마음을 드러내는 아이도 있다. 그 아이의 시를 읽으면서 교사는 자신의 영향력이 어디서 끝나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이 기억난다. 문학 시간에 ‘꽃’과 ‘라디오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을 비교 감상하면서 툭 던진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는데 모든 배움은 모방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아기가 엄마를 따라하면서 세상을 배우듯 일단 비슷하게 해보아야 자기 것을 창작할 수 있다. 그대로 베끼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잡초 함부로 짓밟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당해본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를 패러디한 이 아이를 따로 불러서 창작 배경을 물었다. 한참을 주저하다가 집단 따돌림의 경험과 친구 사귀기에 서툴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포토시 수업을 통해 한 아이의 아픔을 알게 된 셈이다. 수업은 스스로 발표하고 싶다는 아이의 포토시 한 편으로 마무리했다.

태양은 좋겠다. / 나보다 일찍 집에 가고.

운동장 끝자락에 아스라이 햇빛이 비치는 모습의 사진 위에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나는 아이의 감성에 끄덕였고, 아이는 담임의 빗장 풀린 마음을 파고들었다. 보충수업을 빼려고 핑계거리를 찾던 녀석에게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그날, 나는 일찍 귀가해도 좋다는 허가증을 내주고 말았다. 앞만 향해 바쁘게 가지 말고 길섶에 핀 들풀도 들여다보는 아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작가의 이전글 등나무 아래서 쓰는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