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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Oct 15. 2023

귀신통

 섬마을에 사는 지인이 환갑 여행을 온다고 했다. 많고 많은 마을 중에 대구라니. 먼저 도시의 역사를 소개하는 게 좋을 듯하여 ‘골목 투어’를 신청했다. 문화해설사가 나온다니 그나마 맘이 놓였다. 그런데 공항에서 만난 지인은 한두 해 전에 그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았다고 했다. 이른 아침부터 내 고장을 알리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나섰던 맘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해설사는 이미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나와 지인, 딸랑 두 명을 위해 나와 있는 해설사를 꾸역꾸역 따라나섰다. 우리의 상황을 알 리 없는 해설사는 조곤조곤 친절하게 안내를 했다. 사과나무에 얽힌 이야기와 선교사들의 활약상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 기울였다. 교실에서 선행 학습한 학생들의 삐딱선에 상처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인도 진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추임새를 섞으며 들었다. 우리의 성실한 수업 태도에 해설사는 신바람이 났다. 노래를 부르라면 불렀고 기념촬영을 위해 팔을 들라면 다리까지 허공을 향해 뻗었으니까.

 언제쯤 여기서 빠져나갈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내 맘을 읽은 듯 해설사가 말했다.

“귀신통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나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고 지인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설사는 비밀 이야기를 들려주듯 목소리까지 낮추었다. 그야말로 우리의 맘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흐린 날씨 탓에 숲길은 어둑어둑했다. 귀신 이야기하기에 딱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사보담’은 프린스턴신학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1899년 미시간주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다음 달, ‘에피’와 결혼했다. 그녀는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고 마을에서 피아노를 지도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해, 부부는 조선이라는 나라 대구선교지부 선교사로 발령받았다. 불과 스물다섯과 스물셋의 새내기 부부는 집을 떠나 머나먼 전도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5. 1900년 3월, 선교사 ‘사보담’은 아내 ‘에피’를 위해 대구로 피아노를 들였다. 그 과정은 미국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산 사하의 낙동강 하구를 통해 짐배로 거슬러 올라온 피아노를 사문진 나루터에서 하역했다. 그렇다면 대구 동산 자신의 집까지 어떻게 옮겼을까. 피아노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보담’은 깔개, 밧줄, 망치 등을 가지고 인부 이십여 명과 함께 걸어서 사문진으로 갔다.

 해설사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작은 공책을 꺼냈다. ‘사보담’이 남긴 일지의 내용을 적어두었다며 읽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문에 도착하자 강변에 피아노가 있었다. 배에서 내리려면 엄청난 고생을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매우 감사했다. 그때까지 피아노가 물에 묻지 않도록 잘 보관돼 있었다. 짐꾼들은 새끼줄을 만들었는데 두께 5㎝, 길이 15m짜리 세 개였다. 우리가 가져온 길이 420㎝짜리 상여용 막대 두 개를 가져와 피아노 양옆으로 땅에서 30㎝ 높이로 위치시켰다. 그리고 가로막대 다섯 개를 새끼줄로 고정해 견고한 운반대를 만들었다.

 그들은 폭 330㎝ 운반대 위에 피아노를 올려 대구까지 가져갔다. ‘주변 집들에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고’ ‘보리밭 위를 쿵쾅거리며 지났고’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구덩이나 도랑, 연못을 건넜고’ ‘진창 논을 잘 피해야 했으며’ ‘상점들의 물건을 넘어뜨리기도’ 하며 삼일 만에 대구 동산 사택에 닿았다. 그런데 피아노가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해설사는 또 ‘사보담’의 기록을 읽어주며 이번에는 빙의라도 된 듯 탄식했다. 모든 문이 낮아 서서 드나들 수가 없다. 피아노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딱 한 군데 있는데……. 왜 피아노를 들여놓을 창문이나 벽면 오 피트도 없는 걸까. 아 이 멋진 한국식 집이여! 결국, 문틀을 뜯어내야 했다.

 대장정을 마친 피아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제자리에 있는 건반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에는 해설사가 선교사의 미소와 닮은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말을 옮겼다. 저는 건반 조각들을 모아 조립법을 연구했는데 딱 두 건반만 망가져 있었죠. 드디어 첫 피아노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졌습니다. 피아노 조율은 아주 잘 되었고, 저희는 아주 즐겁게 연주하고 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한국에 처음 들여온 피아노로 성경 공부방을 열어 전도에 힘썼다. 무엇보다 ‘에피’의 열정이 아니었으면 그 멀리 미국에서 대구까지 피아노 이동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속사포로 이야기를 쏟아내는 해설사에게 지인이 물었다.

 “귀신통과 피아노가 무슨……?”

 아참! 해설사는 먼 여행을 떠났던 정신 줄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네모난 상자, 괴상하게 생긴 물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당시 피아노를 '귀신 통'으로 불렸다고 했다. 이제나저제나 귀신의 등장을 기다리며, 깜짝 놀란 준비를 하고 있던 지인과 나는 서로 마주 보며 그냥 웃었다.

  낙동강 변에 있는 사문진 나루터.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피아노가 들어온 곳이라는 사실에 갑자기 내 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해마다 낙동강 변에 피아노를 백 대씩이나 깔고 공연을 하는 거냐고 물었다. 해설사의 ‘그렇다’라는 말에 지인의 눈과 입이 쩍 벌어졌다.

  해설사의 표정이 사뭇 경건해졌다. 그 사연을 들어보니 그럴만했다. 1907년 부부는 안식년을 맞아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가스폭발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백여 년이 흐른 뒤, 손녀들이 부부의 유품 등을 안고 한국에 들어와서 특별전을 열었다. 그들은 약속을 기어이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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