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장애인이다. 백 일을 갓 지났을 무렵,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허무와 분노를 삭이며, 대한민국의 평범한 쳥년으로 살아왔으나 학위 논문을 쓰다가 운명처럼 장애운동을 만났다. 스스로 소시민인 줄 만 알았으나 어느새 길바닥 농성장을 누비는 데모꾼이 된 자신의 모습에 매일 놀란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냈다. 장애시민 불복종. 사뭇 도발적인 제목이다.
저자와 독자의 만남을 가졌다. 장소도 시간도 독자인 내가 일방적으로 정해 버린 이상한 사인회였다. 아무튼, 포스트잇이 어지럽게 붙어있는 책을 그에게 내밀었다. 표지에는 목발을 내려놓고 스탠딩 의자에 올라앉은 그의 모습을 중심으로 숱한 단어와 문장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다.
'장애, 고통, 불평등, 침묵, 차별, 소통, 어떻게 질 것인가, 기회, 이동 권리 등'
책날개와 마주한 속표지에 내 이름 석 자를 공들여 적었다. 줄 바꿈을 하더니 삽시간에 그의 마음을 휘갈겼다.
'투쟁입니다. 투쟁!'
앞뒤 자르고 보면 작가가 엄청난 싸움꾼으로 생각되겠지만, 그는 여리고 따뜻한 청년이다. 장애는 그의 몸을 한없이 왜소하게 만들었다.
독립서점을 절뚝거리며 한 바퀴 휘 둘러보더니 책 한 권을 집었다. 자신의 책을 팔러 온 서점에서 다른 이의 책을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안아주고 싶었다. 그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서는 제가 좀 편하게 이야기해도 되겠구나 싶어요. 이런 책을 꽂아두는 서점이 흔치 않거든요."
그가 만지작거리는 책 표지의 절반 이상은 범상치 않은 한 남자의 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 반 삭발에 한복 두루막 차림의 남자는 '백촌 강상호' 선생이라고 했다.
'형평운동'
생소한 단어 앞에 허둥대는 나를 그가 얼른 부축했다. 그는 육체적 장애인이었지만 나는 배경지식의 장애인이었다. 공자가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가 내 아들뻘이지만 내가 모르는 것을 묻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다.
2023년 4월 6일, 형평운동 백 주년을 맞았다. 형평운동은 조선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던 백정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강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반 차별 인권운동이다. 형평운동을 주도한 단체의 이름을 저울(衡)처럼 평등(平)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단체(社)라는 '형평사'로 정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형평운동은 모든 인간의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평등 운동이다. 이 고귀한 운동의 중심인물이 백촌 강상호 선생이다.
6. 백촌 강상호 선생은 백정 출신도 아니었다. 양반 지주의 아들로서 기득권을 버리고 인권운동에 앞장서서 새(新) 백정이라는 욕설과 돌팔매질을 당하는 험한 길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신분 제도의 폐지 이후로도 계속 차별을 받던 백정에 대한 차별 관습을 없애는 일에 그치지 않고, 평등한 사회 건설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그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백정의 두 아이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켜 입학을 도왔으며,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등 형평 운동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57년 12월 29일 사망한 선생의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모인 백정 출신의 인사들로 9일장이 치러졌다.
소수정책연구자로서 인권활동가인 그가 강상호 선생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지사다. 나는 역사적 흔적을 찾아 진주로 향했다. 1887년 태어나 형평운동을 주도한 '백촌 강상호 선생‘ 묘소가 있는 고장이기 때문이다. 현재 선생의 묘소는 진주 새벼리 언덕 길가에 있다. 묘소 앞에서 '형평'이라는 단어와 마주하고 섰다. 되짚어보니 쥐구멍이라고 찾고 싶은 심정이다. 말로 차별하고 행동으로 상처 주기를 일삼았다. 어디 그뿐인가? 생각으로 했던 무시와 무관심을 저울로 달면 무간지옥에 떨어질 지경이다.
내친김에 진주성 동문 앞에 세워진 '형평운동기념탑'도 보러 갔다. 남과 여,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탑의 양쪽 옆면에는 각각 ‘인간 존엄, 인간 사랑’과 ‘자유 평등, 형평 정신’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제 한 몸 가누기조차 버거운 그의 외침인 듯 쟁쟁하다. '장애인차별철폐운동'에 앞장서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