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선물

by 하울

반드시 있어야 하는 남편이 명단에 없었다. 한글을 갓 배우는 아이처럼 이름 석 자를 찾아내려고, 눈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움켜잡듯 포기하지 않고 보고 또 보았다. 승진에서 탈락한 날 밤, 남편은 어둠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텁텁한 공기만 내 가슴을 들락거렸다. 죽은 아이를 붙들고 매달리는 어미의 몸부림처럼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승강기에 실려 올라온 더위는 모조리 우리 집으로 몰려와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습기가 집을 통채로 점령한 듯했다. 한여름의 공기가 질척대며 나와 겨루기라도 하자는 것인가 싶어 마음에 불길이 일었다. 현관문의 아랫도리에 찍힌 희미한 발자국들이 유독 가슴을 파고들었다. 누구의 발길질인지도 모를 정도로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삶의 얼룩들이었다.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방법을 보면 하루를 가늠할 수 있다. 하루가 무탈할 때는 일정한 간격의 시차를 두고 또박또박 번호 키를 누르지만, 업무상 엇박자가 나는 날에는 비번을 알아내려는 금고털이범처럼 버벅거렸다. 가끔은 정신 줄이 끊어지도록 술에 절어진 몸이 되어 동료의 부축을 받는 날도 있었다. 그때 어쩌면 자신의 정신 줄을 잘라내어 사다리를 만들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 높은 하늘 어디엔가 있을 별을 쳐다보며 조금씩 오르기 위해. 그러나 이제는 오르지 못할 별에 대한 아쉬움과 목전에서 주저앉아 아파할 남편의 앓는 소리가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 같았다.

자정이 지나자 소리에 대한 반응이 예민해졌다. 새삼 허망함이 밀려왔다. 언젠가는 내려와야 할 산이었기에 조금씩 맘을 다잡기는 했으나 막상 떠밀리는 기분은 까무룩했다.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인데 조금 빨리 매를 맞은 거려니 생각해 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어디에서 밤보다 짙은 아픔을 술잔에 섞어 마시고 있을까.

승강기의 층수를 알리는 숫자가 십팔에서 멈추기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삑삑삑, 번호 키를 누르는 소리만 들릴 뿐,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남편을 들여보내기 위해 애쓰는 낯선 목소리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현관 등이 켜지고 술 냄새가 먼저 들어섰다. 넥타이는 반쯤 풀어져 남편의 몸뚱이처럼 펄럭였다. 남편의 짐 보따리를 받아들고 흐느적거리는 남편을 부축하느라 진땀이 흘렀다. 남편은 정리함까지 가져오느라 많이 지쳐 보였다. 직책과 이름 석 자가 적힌 명패가 담긴 상자는 삼십 년이라는 세월에 반해 너무 단출했다.

"여보, 미안타."

남편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위엄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던 남편이 총상 입은 짐승처럼 바닥에 꼬꾸라졌다. 낯색은 붉은 핏빛이었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는 나의 손을 잡으며 줄 게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양복을 달라고 하더니 이곳저곳을 뒤적였다. 왼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서 잠시 머뭇거렸다. 비틀거리는 남편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온 것은 앙증맞은 상자였다. 무엇이냐고 물었다.

"선물!"

짧은 대답이 단칼에 잘린 남편의 처지처럼 단호했다.

"마지막 선물이다."

그것을 내 손에 쥐어주며 남편은 내 등을 두세 번 두드리더니 갑자기 나의 가슴에 와락 안겼다. 그 순간 억장이 무너지고 새까맣게 타던 속이 재가 되어 와르르 무너졌다. 긴 줄에 열쇠 모양의 장식물이 달린 목걸이였다. 남편은 이제 직장을 잃었으니 나에게 번듯한 선물을 해 줄 수가 없다고 중얼거리며 횡설수설하다가 나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누웠다.

이 매장 저 매장을 기웃거리며 아내의 취향을 고민했을 남편, 가면무도회 같은 위로의 술자리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을 남편, 조직이 제공한 차량에서 마지막으로 내렸을 남편의 모습이 그려졌다.

술과 마늘이 범벅된 냄새를 내뿜는 남편 옆에 누워 목걸이를 만져 보았다. 가슴에 매달린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남편의 갑갑한 마음을 시원하게 열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잠긴 앞날을 열어 줄 열쇠. 남편이 문을 열지 못해 답답할 때 행운처럼 슬며시 다가와 줄 열쇠 하나를.

고상하게 빛을 발하던 목걸이로 눌러진 그날 밤의 막막함을 뒤돌아보면 남편의 나에 대한 배려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길이였다. 심해의 어둠보다 짙은 아픔에서 길어 올린 마지막 선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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