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울 Oct 15. 2023

남기면 벌금 백만 원

  낯선 도시에서 갈팡질팡했다. 지도 앱에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만 계속하는데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간판만 살피다가 눈이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살짝 지친 나는 흘러내리는 선글라스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아무 곳이나 들어갑시다. 노포라고 뭐가 다를까.

  노포란 대대로 물려받은 점포, 즉 오래된 가게를 의미한다. 노포는 인테리어가 세련되지도 않고 깔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최소 삼사십 년이 된 가게들이 많으므로 시설이 좋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장사를 이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훌륭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맛집을 찾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그가 노포의 맛을 느껴보고 싶다기에 따라나섰다. 노포의 맛을 나도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레트로 감성도 무더위 앞에서는 항복했다. 밀 냉면 맛이 뭐 거기서 거기겠지. 그와 나의 눈빛은 '가자 밀 냉면'을 향해 있었다. 그때 노인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어디를 그렇게 찾아다니는가? 부전 밀 냉면이요. 가자, 나도 거기 가는 길이니 따라오소. 아뿔싸! 그런데 '가자 밀 냉면'이 바로 '부전 밀 냉면'이라는 사실. 업은 아기 삼 년 찾는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가게를 코앞에 두고 그토록 애태웠단 말인가.

  밀·냉·면. 이 붉은 세 글자가 여기저기 나부끼는 거리에서 '부전'은 그야말로 숨은 그림 찾기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손님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야지 이게 뭐냐며 투덜대도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비빔, 물 한 개씩? 다짜고짜 메뉴를 정해버리는 노포의 무례함을 따지기엔 주인장이 너무 어르신이었다. 독심술이라도 익힌 것일까. 그러지 않아도 그는 비빔, 나는 물냉면을 시키려던 참이었다.

  근데 이 집 노포 맞을까. 손님이 너무 없잖아. 그에게 귓속말하는 내 모습을 훔쳐보는 눈길이 있었다. 옆 테이블의 남자 둘, 여자 두 명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듯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나는 괜히 너스레를 떨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맛집이라는 소문을 듣고 대구에서 왔다고 했다. 어머나! 같은 동네 사람을 만난 반가움과 함께 헛걸음하지 않았다는 확인도장을 받은 듯 맘이 놓였다.

  서너 평 남짓한 가게에 직원은 딸랑 두 명, 주방에서 일하는 할머니와 홀 서빙 할아버지가 전부였다. 내가 손님이지만, 어르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엔 맘이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고 컵에 물을 따르는 순간, 할아버지가 다가오셨다.]

  "마실 만큼 따르고, 남기면 벌금 백만 원!"

  물병을 가져다주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적반하장이라도 유분수지. 은근히 화가 나려고 했지만 정중하게 그 이유를 물었다. 앗! 묻지 말걸. 괜히 물었다.

  "이 물로 말할 것 같으면 통도사 옥련암 약수여. 내가 매일 새벽 다섯 시에 가서 기도하며 떠 온 물이라. 기도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 손님들 내가 주는 냉면 묵꼬 모두 건강하라고. 그 약수에다가 소머리를 넣고 푹 고아서, 다시 열일곱 가지 약재를 넣고 이십 사 시간 끓인 물을 육수로 쓴다 이 말이여. 그러니……."

  그때, 그는 냅킨을 두어 장 뽑아 식탁에 깔고 그 위에 수저를 가지런히 놓고 있었다. 

  "이 양반아, 냅킨은 뭐 하려고 까노? 이 식탁! 내가 하루에 골백번도 더 닦는다. 냅킨이 얼마나 몸에 해로운지 아나? 표백제 말이다."

  할아버지의 버럭질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마시던 나는 사레가 들렸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 그의 행위는 당연한 퍼포먼스이지 아니한가. 백번 지당한 할아버지 말씀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어라 항변하려던 순간이었다. 옆자리에서 냉면을 자르기 위해 가위를 달라고 했다.

  "면을 가위로 자르면 창자 터진다. 그냥 묵어라."

  이건 또 무슨? 뜬금없고 황당한 할아버지의 논리에 그와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누르는데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제발!

  우리끼리 편안하게 먹도록 할아버지가 자리를 떠나 주시길 소원했지만, 그냥 소원일 뿐이었다.

  "육수는 붓지 말고 중간중간 마시그래이. 한 손으로 내일까지 비빌래? 두 손으로 안 비비나?"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불호령에 그의 왼손이 서둘러 오른손을 도왔다. 나는 음식 판정단의 자세로 육수를 눈으로 먼저 살폈다. 맑은 빛깔이 맘에 들었다.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맛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할아버지에게 가게 확장 의사를 물었다가 또 꾸지람을 들었다.

  "보소, 내 나이 올해 여든 하나요.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자기 명에 못 살아."

   옆자리에서도 맛나다는 말과 노포를 인정하는 몸짓들이 쏟아졌다. 그들 사이에서 서로 음식값을 내겠다는 가벼운 실랑이가 잠시 벌어졌다. 그중에서 한 명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자, 이번에는 할아버지께서 애교 섞인 호통을 쳤다.

  "이렇게 맛난 면을 먹고 카드로 결제하면 되겠어?"

  우리도 감히 카드를 내밀지 못했다. 노포에서는 결제 수단마저도 노포여야 하는구나 싶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