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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Oct 15. 2023

경력을 거꾸로 읽으면

  나는 '햄릿 증후군'을 앓고 있다. 흔히 ‘선택 장애’로 불리는데, 평소에는 별 증상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내가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만 되면 판단력을 잃고 허둥지둥한다. ‘어느 순간’이 언제냐 하면, 바로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앞에 두고 있을 때다. 물냉면과 비빔냉면, 짬뽕과 짜장면, 칼국수와 수제비. 이들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 나의 우유부단함은 극에 달한다. 나의 내적 갈등은 '사느냐 죽느냐'로 고민한 햄릿처럼 처절하다. 이런 병증을 알고 있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가 막히게 맛있는 짬뽕집을 알고 있다면서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안 그래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인지라,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던 참이었다. 친구는 가게 주소를 보내며 설명을 보탰다.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며 맛을 장담했다. 먼 거리에 맘이 내키지 않았다. 슬며시 발을 빼려고 하자 나로 인해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하소연했다. 졸지에 나는 ‘햄릿 증후군’ 가해자로 몰렸다. 이번에 거절하면 너랑 같이 밥 먹는 일은 없을 줄 알라며 협박까지 했다.

 물안개가 내려앉은 바다의 수평선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한 장면처럼 아득했다. 저만치에서 친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맞장구로 두 팔을 번쩍 들며 다가서자, 대기 번호표를 내밀었다. 십오 번.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고 묻자 친구는 어깨만 으쓱했다. 아리송할 때 하는 그녀만의 제스처다. 손님들의 눈길은 하나같이 입장을 알리는 전광판을 향해 있었다. 딩동. 자기 번호가 뜨면 잽싸게 가게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례가 다가오자, 식당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낯빛에 ‘맛을 인정한다’라는 몸짓이었다. 그때 줄 뒤편을 돌아보았다. 중년 아줌마 서너 명의 깔깔대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고 신나는지. 구르는 낙엽에도 우스워 죽는 소녀처럼 연신 까르르까르르 웃었다. 그중 차림이 후줄근한 한 명이 말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난 이 동네 살아도 이런 집이 있는 줄 몰랐네.”

 “그러니까 이제 모임에 자주 나와.”

 아줌마들의 분위기는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상했다.

  이번에는 빨간 우산을 받쳐 든 아줌마가 말했다. 이 집은 소뼈로 국물을 우리는 중식당이다. 식사 시간에는 보통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곳이지. 주문 즉시 음식을 조리하기 때문에 식당 안에 들어가서도 더 기다려야 할 수 있어. 특히 은은한 소고기 향이 나면서 특유의 맛이 나는 짬뽕. 작은 공깃밥이 함께 나오는데, 짬뽕을 다 먹은 뒤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면……. 딩동, 십오 번 손님을 부르는 전광판의 재촉에 식당 문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주문하고도 정말 오래 기다렸다. 이십여 분 정도. 모두가 얌전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희는 주문 즉시 요리를 하여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맛있는 식사로 보답하겠습니다. 벽 한쪽에 걸린 손님에 대한 친절한 경고문 때문이다.

반대편 벽, 액자에는 ‘SINCE 1973, 백·년·가·게’라는 큰 제목 아래에 자잘한 글이 적혀 있었다. 대충의 내용은 이러하다. 오십 년 동안 중식당을 운영하며 맛집으로 성장에 온 가게는 해산물이 풍부한 곳에 있다. 해물짬뽕에는 갯벌에서 채취한 어패류를 넉넉하게 넣는데, 그 많은 양을 먹는 동안에도 면이 붇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불맛이 살아있는 조리 방법, 자체 개발한 육수, 신선한 재료의 삼박자가 어우러져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음식이 나오자 먹음직스러운 건 당연지사였다. 이름대로 조개와 홍합이 듬뿍 들어있었다. 그런데 국물에 기름기가 하나도 없었다. 짬뽕이 이럴 수 있을까. 이리저리 살펴보니 고기와 오징어가 보이지 않았다. 열량이 반토막 난 느낌이었다. 국물 맛은 얼큰하면서도 진했다. 연이어 면을 젓가락에 휘휘 감아 먹으려는 순간, 입구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대기 줄 뒤편에 서 있었던 아줌마들이었다. 하필이면 우리 옆자리라니. 이제 조용하게 맛을 감상하기는 글렀구나.

  빨간 우산 아줌마는 이 가게의 홍보 대사를 나서야 할 판이었다. 진짜로 짬뽕 예찬론자인 듯한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중화요리 외길 인생을 걸어온 이 가게 사장은 최종학력이 초등학교라는 말에 내 친구의 눈이 왕방울이 되었다. 중학교에 다니다 먹고살아야겠다 싶어 일을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랬을까.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 음식점에서 팔 년 동안 일했다. 그야말로 ‘주방 식구’였던 것이다.

  스물한 살에 문을 연 이 가게는 최근에  ‘전통명가’로 인정받았다. 인정받은 것이 무색해지지 않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손님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내어 주는 사람이 되겠다. 이러한 가게의 다짐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곳을 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인장의 하루 시작은 장보기다. 직접 눈으로 보고 사야 마음이 놓인다. 오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이제 그냥 먹고 자는 일처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장 보러 다닌다. 이 집의 짬뽕이 신선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교가 나면서 대로변에 있던 가게는 철거해야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바다가 보이는 외곽에 건물을 짓고 자리를 옮겼다. 횟집이라면 모를까 누가 바닷가 중화요리 집에 올까. 그러나 주인의 걱정과는 달리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손님들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는지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다.

  지금껏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듣기만 하던 아줌마가 말했다.

 “경력을 거꾸로 읽으면? 그냥 얻어지는 경력은 없습니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인데. 가물가물 했다. 이 대사를 끝으로 아줌마들의 수다가 뚝 끊겼다. 짬뽕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줌마들의 묵언수행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짬뽕 그릇을 싹 비우고 문을 나섰다. 그새 비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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