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비관주의 의사의 세상 살이
“너는 꿈이 뭐니?”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자주 들은 말이고 심지어 성인이 되고 나서도 간혹 듣는 질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들은 질문일 것이다. "식사하셨어요?"가 정말 식사를 했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사말 대신으로 쓰이듯 꿈에 대한 질문도 그렇게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는 다른 사람의 꿈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태어나서 1년밖에 안된 아기의 돌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돌잡이 행사를 한다. 아기가 무엇을 잡는지 하는 것으로 장래 그 아이가 어떤 인생을 살지 점을 친다.
꿈은 다른 말로 장래 희망 혹은 목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너는 꿈이 뭐니?"
"학생은 장래 희망이 뭐예요?"
"당신은 목표가 무엇입니까?"
"원장님은 어떤 것을 바라세요?"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나는 과연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는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다.
목적이 이끄는 삶
미국의 릭 워렌이라는 목사가 2002년에 쓴 책 “목적이 이끄는 삶”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나서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들에서도 그의 주장을 널리 전파했다. 덕분에 기독교에서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최고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물론 책을 쓴 목사가 말하는 목적은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목적이지만 비단 기독교도가 아니라도 자신의 삶에 있어 목적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나는 기독교 재단에서 세운 고등학교를 다녔다. 매주 성경 공부를 하고 간증을 한 달에 한 번씩 들었다. 나는 어릴 때 꿈이 과학자이기도 했던 점에서 보듯 무언가 분명하고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면 쉽게 믿지 못하는 성격이라 지금도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학창 시절에 들었던 간증 중에 일부는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것들도 있다.
전신에 화상을 입었던 어느 분의 이야기는 바로 어제 들은 이야기처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도 심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긴 화상 흉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마음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분도 그랬고 간증을 한 다른 분들도 한결같이 하는 말은 우리는 다 신의 뜻이 있어 태어난 존재이며 그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하자면 목적이 이끄는 삶이다.
도망자는 반드시 잡힌다
형사분들에 들은 말인데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드라마에서 보면 범죄자가 도주하면 그를 뒤쫓는 형사는 결국 놓치는 장면이 많은데 실제로는 대부분 범죄자는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잡힌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망치는 범죄자는 갈림길에서 이쪽으로 갈지 저쪽으로 갈지 순간 망설이게 되고 멈칫하는 순간이 있어 속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반면 범죄자를 쫓는 형사는 범죄자라는 목표물이 앞에 있기 때문에 조금의 속도 저하도 없이 전속력으로 달려간다고 한다. 결국 달리기 속도나 지구력이 많이 차이가 나지 않고 엇비슷한 경우라면 뒤쫓는 사람의 속도가 더 빠르다고 한다.
경제 영역도 마찬가지다. 맨 앞에서 달려가는 1위 기업은 처음 가는 길이기 때문에 시행착오도 겪고 어떤 쪽으로 사업을 끌고 나가야 할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패스트 팔로워라고 하는 후발 기업들은 1위 기업이 간 궤적으로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훨씬 손쉽게 1위 기업이 도달한 지점에 다다를 수 있다.
물론 거의 비슷하게 쫓아갔다고 해서 1위 기업을 손쉽게 추월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쫓는 것과 넘어서는 것은 흡사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단 경제영역만이 아니라 학업에서도 그렇고 2위가 1위를 바짝 추격하는 것은 쉬운 편이지만 추월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흡사 앞서가는 거북이를 절대 이길 수 없는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를 다룬 제논의 역설을 생각나게 한다.
여하튼 1위를 넘어서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범죄자를 쫓는 형사처럼 인생에 있어 어떤 목표 혹은 목적이 있다는 것은 삶을 이끌어주는 효과적 동인이 된다. 그것은 돈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즐겁게 사는 삶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다른 사람을 돕는데서 오는 보람일 수도 있다. 그런 목표 의식이 강할수록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해지기도 하고, 씀씀이가 헤픈 사람은 검소해지고, 어리숙한 사람은 똑똑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택하기를 권하는 쪽이다. 그 목적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거나 아니면 세상을 더 나쁜 쪽으로 퇴보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의 꿈
나는 하다가 그만둔 숱한 것들이 있다.
병원도 두 번을 폐원을 했고 미술반 동아리 활동도 1년만 하다 말았다. 몇 년간의 달리기 운동도 마라톤을 완주한 뒤로 그만두었다. 70kg대로 유지하던 체중은 어느 순간 80kg에 접어들고 말았다.
하루에 매일 10kg씩 달리기 운동을 하던 때의 목표는 마라톤 풀코스 완주였다. 내 운동의 목표가 거기까지 였기 때문에 마라톤 완주 후에는 내 운동의 목표는 사라졌다. 북극점을 찾아 긴 여행을 하던 사람이 막상 북극점에 도달하면 갈 곳이 없어지는 것과 같았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4 년 내내 도서관에서 살면서 스펙 쌓기에 열중한다.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끝이 아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하면 자식을 낳는다. 자식까지 생겨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면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서 더 많은 보수를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록 온 힘을 쏟는다.
결국 다람쥐 챗바퀴다. 그렇게 돌다가 어느 날 더 갈 곳이 없어서 혹은 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진 채로 생을 마감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다만 좋은 대학이나 마음에 드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과 같은 일들은 목표라고 하며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술과 전쟁의 차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 목표와 목적은 분명하게 구분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이 목표이고 행복은 목적이라고 말해 봐야 그 둘의 차이를 별반 느끼지 못한다. 돈이 곧 행복이고 행복이 돈이다.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
나에게 목표가 있냐고 물으면 빚을 갚고 좀 편하게 병원 운영을 하면서 휴일이 있는 삶을 살고 가족들 부모님과 때때로 여행을 다니는 일이다.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즐겁게 살다 가는 것? 그럼 그런 목표가 있어서 내 삶이 훨씬 의미가 있고 위에 말한 것처럼 더 나아진 삶을 살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목표와 목적이 없었다 해도 별반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병원을 두 번 폐업했고 이혼은 안 했지만 가정법원 앞까지 가서 가정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그때도 목표와 목적이 없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다.
자금은 언제 분만을 포기해야 할지 언제 병원을 그만두어야 하는지 매일 고민하면서 산다.
꿈이 없다고 비참한 인생은 아니다
누군가 종교에 대하여 그리고 삶의 목표에 대하여 어떤 자세가 좋은지 묻는다면 내 대답을 항상 일정하다.
종교는 없는 것보다 가지는 것이 낫고 목표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단 세상사에는 가지고 싶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왜 꿈이 없냐고 한심한 눈으로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꿈을 가지기 싫어서 안 가진 것이 아니며 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의미 없는 인생이 아니다.
흔히 꿈이나 목표를 인생의 나침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목적지가 어딘지를 모르고 비행기를 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비유로 반박을 하자면 어떤 사람은 비행을 즐기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비행기가 어디에 도착하던 도착한 그곳에서 즐겁게 살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목적지가 정해진 여행만이 즐겁고 목적지도 모르는 채 가는 여행은 즐거울 수 없다는 것은 착각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럭키 박스라는 것이 인기다. 안에 내용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물건을 사는 것이다. 어떤 물건이 나올지, 내가 지불한 액수보다 더 비싼 것이 나올지 아니면 더 싼 물건이 나올지 궁금해하면서 돈을 지불한다. 럭키 박스가 인생의 모습과 너무 닮아서 아마 인기를 끈 것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