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음
분만 전 추민하에게 양석형이 따로 불러 부탁한다.
추민하: 입을 막으라고?
양석형: 코랑 기도는 막지 말고 아이 울음소리만 안 나오게 입만 살짝 막아.
추민하: 은헌이는 어시니까 손이 없고 너 들어와서 아기 입만 막으라고, 태어나자마자 바로.
양석형: 알았지?
추민하: 분노의 눈빛, 이글이글
간호사: 민하쌤 몇 년 차지?
추민하: 2년 차요.
간호사: 잘 들어요. 나 그 산모 신경 쓰여서 좀 전에 만나고 왔거든. 혹시 아기 태어나면 보고 싶으시냐고. 보고 싶으시면 보여드릴 수 있다고.
오래 생각하시더니 괜찮다고 보면 자기 너무 힘들 것 같다고 그러시더라고. 사실 그분은 외부에서 임신 종결을 안 한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거야.
그런데 막 나오는데 양석형 교수가 문밖에 서있더라.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이따가 아기 나오면. 혹시 아기가 울게 되면.. 나보고 음악을 좀 크게 틀어달래.
다른 사람한테 따로 부탁한 것도 있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 따로 부탁한다고.
추민하: 한숨...
간호사: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지. 그래도 뚱한 양반이 웬일인가 싶어 모른 척 물어봤지. 왜 그러냐고.
엄마는 다 알고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그래도 아기가 우는 순간 아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그 트라우마는 평생 갈 거라고. 자기는 힘든 일 겪은 산모한테 그런 트라우마 겪게 하고 싶지 않데.
첫 번째 장면의 대사는 무뇌아를 출산하게 된 산모가 출산 순간에 아기의 울음소리 때문에 마음에 트라우마가 생길 것을 걱정해 담당 의사인 산부인과 전문의 양석형 선생이 전공의에게 부탁하는 대사다.
두 번째 장면의 대사는 그런 양석형 선생을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전공의 추민하에게 그 사유를 알려 주는 내용이다.
아래는 내가 겪은 실제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나의 의견이다.
나는 과거 낙태 시술 의사로 20년을 살았고 그 기간 동안에 10여 년 정도는 미혼모들의 산전 진찰과 출산을 도왔다.
낙태를 원해서 오는 산모들은 보통 초음파 검사 때 아기 심장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음의 짐이 더 커질 것 같아서 일 것이다. 그러나 출산하기로 마음을 먹은 산모들은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기를 원했고 아기의 얼굴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입체 초음파도 해 주길 원했다.
미혼모 산모 중에는 애란원이라는 입소 시설에서 온 산모처럼 본인이 직접 아기를 키우는 경우도 있고 홀트와 같은 입양 센터를 통해 온 산모들처럼 출산하자마자 입양을 보내는 산모들도 있었다.
아기를 입양 보내는 산모든 자신이 키우는 산모든 모두 초음파로 아기를 보기를 원했다.
이는 출산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산모들은 자신이 키우는 것과 관계없이 거의 대부분은 아기를 보고 안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함께 보호자로 온 산모의 엄마 그러니까 아기의 할머니의 요구는 달랐다. 입양하는 경우의 산모 들일 때는 하나 같이 산모가 아기를 보는 것을 말렸다. 괜히 마음만 아프고 상처만 남게 될 것이니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기를 낳은 산모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어떤 선택이 그 아이의 일생과 엄마의 남은 인생에 더 나은 선택일까?
나도 답은 모른다. 그녀들의 인생을 내가 옆에서 긴 세월 살펴볼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산모의 선택이 제일 중요하므로 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출산 전에 물어본다. 실제로 10년 동안 만난 숱한 미혼모 중에 거의 대부분 산모는 아기를 보기를 원했다. 비록 자신이 키우지 못해 미안하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지만 자신의 아기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은 본능에 가깝다고 나는 느꼈다. 누가 키우느냐 하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다. 트라우마가 되고 안되고는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달렸다. 아기를 보고 싶어 한 산모가 아기를 보았다고 해서 트라우마가 되는 것과 보지도 못하고 보내서 트라우마가 되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트라우마로 남을 것인지는 실제로 옆에서 그런 산모를 한 번이라도 본 의사라면 알기 어렵지 않다.
현실과 드라마는 다르다. 드라마와도 다를 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 혹은 상상과도 다르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각, 백각이 불여일행이라고 했다.
이제 드라마의 경우인 무뇌증 아기로 돌아가 보자.
다음은 사례는 내가 겪은 것은 아니고 무뇌증 아기를 출산한 외국 산모의 실제 사례다. 서울 신문의 기사 일부를 발췌 정리하였다.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에 사는 케리 영과 로이스 영 부부는 임신 중이던 뱃속 아기에게 치명적인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의료진은 태아가 무뇌증(뇌의 일부 혹은 전부의 선천적 결여)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아기가 태어나도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무뇌증 아기 대부분은 사산되거나 살아 남아도 30분, 오래 살아야 일주일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부부는 의사와의 면담을 통해 장기 기증을 생각하고 아기를 끝까지 임신하고 출산하려고 했다. 그러나 임신 37주 차 때 아기가 자궁 내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결국 장기 기증은 할 수가 없었다.
출산할 수 있기를 바랐던 아기의 엄마와 아빠는 많이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때 아기의 아빠가 한 말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단 몇 초 만이라도 에바의 아버지이고 싶었다.”
생명의 가치는 그 길이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하루를 사는 삶은 가치가 없고 백 년을 사는 삶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 하루의 삶도 소중하다. 물론 나는 당사자가 원한다면 그리고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태아나 아기일 때는 엄마와 아빠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에서도 가족의 의견을 따라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10개월간 아기를 품었던 엄마의 마음이었을까? 그렇다면 10개월의 임신 기간의 의미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나는 두어 명의 무뇌증 아기의 출산을 도왔다. 물론 오래전 일이고 사산되어 나왔다. 살아 있지 못했기 때문에 아기의 울음소리를 막거나 음악을 틀지는 않았다. 할 수 있었다 해도 안 했을 것이다. 산모의 의견을 물어서 했겠지만 아기의 울음소리가 괴로웠을 산모라면 아마 만삭까지 끌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에서처럼 나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아기는 며칠 못 버틸 것입니다. 얼굴을 보고 울음소리를 들으면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고 지금 듣지 않으면 다음에 보고 들을 수는 없습니다. 아기는 단 3일만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산모의 입장에서 아마 나는 잔인한 의사일 것이다. 살지도 못하는 아기를 보여 주고 들려주려고 했으니까. 그냥 아무 말 없이 드라마 속의 의사처럼 처리해 주기를 바랄 수도 있다.
시각 청각 모두 장애가 있던 헬렌 켈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의 수필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3일간 볼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녀가 하고 싶은 것들은 다음과 같았다.
그동안 자신을 가르쳐준 설리반 선생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보는 것.
친구들을 만나고 들로 산으로 산보를 가는 것.
큰 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는 것.
그녀가 소중한 3일간 하고 싶어 한 일은 우리가 보기에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헬렌 켈러가 3일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것이 산모가 자신이 낳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울음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대단한 것이었을까?
우리가 잔인하다고 생각하고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일들은 어쩌면 삶의 본래의 모습이고 보고 겪어야 할 일이고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보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일, 또는 멋진 의사가 하는 말은 어쩌면 삶을 부정하는 마약 같은 것은 아닐까?
나는 현실의 의사다. 그래서 잔인한 의사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엄마는 아픈 아기, 곧 죽을 아기는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아기를 보지 않도록 엄마를 억지로 유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