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업 역사]
취업하기로 결심하고 처음 취직한 곳이 강남에 있는 삼성 의료원이다. 지금은 삼성 의료원이 강남 외에도 몇군데 더 생겨서 이름이 삼성 서울병원으로 바뀌었다. 그 당시 삼성 의료원은 아직 병원 건물이 없이 강남구 일원동에 병원 건물을 준공하는 중이었다. 병원을 출범하기 위한 내부 시스템 준비 작업도 필요했는데 일원동 넓은 부지 한쪽 구석에 컨테이너 박스 몇 동을 이어서 의사들과 행정 직원들이 진료에 필요한 여러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나는 그 컨테이너에서 대략 4,5 달 정도 보내고 병원이 준공되고 나서 6개월 정도쯤 근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산부인과에는 나와 과장님 등 두사람만이 근무를 했고 개원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외국에서 연수 중이던 나머지 4명 정도의 스탭도 진료에 참여하였다.
당시 삼성 의료원은 의과대학과 따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이삼년 이내로 성균관 대학교에 의과대학을 만들어서 부속 병원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의과대학과의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은 산부인과 의사이자 의과대학 교수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안정적인 직장이 된다는 의미도 있다. 나는 전임의로 가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계약직이었지만 1년 정도의 전임의 생활이 끝나면 병원의 정식 직원으로 채용될 예정이었다. 서울대 병원, 신촌 세브란스 병원, 아산 중앙 병원, 강남 성모 병원과 함께 삼성 의료원이 국내 빅 5 병원으로 불려지기 때문에 나의 동기들은 개업하지 않고 봉직할 생각이라면 그 곳 중에 한 곳에 취업하는 것이 목표였다.
삼성 의료원에서의 근무 기간은 비록 1년 정도 밖에 안되었지만 여러가지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
당시 삼성 의료원은 새로 생긴 대형 병원으로 아산 서울 병원이 근처에 있기도 하고 현대와 삼성이라는 국내 대기업의 상징과도 같은 기업체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라는 공통점도 있어서 삼성 의료원으로서는 차별화 전략에 신경을 많이 썼다.
촌지 안 받는 운동도 삼성 의료원에서 제일 먼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의사나 간호사들에게 전하는 촌지는 대부분 좋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막연한 압박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어떤 병원은 은근히 촌지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삼성 의료원에서는 전 직원이 일체의 촌지를 받지 못하도록 하였고 촌지를 받은 것이 적발되면 인사상 불이익까지는 아니라도 눈치를 준다. 일종의 뇌물성 촌지인 제약 회사의 리베이트도 일체 받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그래서 어느날인가는 산부인과 외래에 어떤 분이 소고기 선물을 두고 갔는데 누가 둔 것인지 확인이 안되어 반송도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썩고 말았던 사례도 있다.
그리고 의사들이 진료하지 않을 때 근무하는 사무실은 시니어 스텝은 1인당 한방, 주니어 스텝은 2인이 한방을 썼다. 제일 막내였던 나는 동기와 한방을 썼다. 그런 사무실이 모여 있는 연구동은 보안 키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도록 외부에서 차단되어 있었다. 환자나 보호자 혹은 영업 사원등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기존의 대학병원들과는 다른 구조라 처음에는 상당히 불편했지만 영업 사원들이나 기타 잡상인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서 편한 점도 있었다. 전에 서부 지방 법원 조정 위원을 할 때 잠깐 법원과 검찰에 출입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나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아마도 같은 맥락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일 획기적인 것은 병원 전체를 금연 시설로 지정했다는 점이다. 병원 뿐 아니라 건물 내에서의 금연은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30년 전인 그때는 병원에서 금연하는 것은 삼성 의료원이 최초라서 직원들의 반발도 많았다. 그러나 우스운 일이지만 병원장님이 애연가라서 그 방만은 유일하게 예외였다. 그래서 시니어 스탭들은 그 방에서 원장님과 함께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그 분은 내과의 폐암 전문가였는데 폐암으로 돌아 가셨다.
처음 시작하는 병원이라 아무런 준비가 없어 그곳에 근무하면서 산부인과에 쓰이는 많은 안내문도 만들었다. 물론 내용 초안은 내가 작성했지만 전체적인 디자인이나 글꼴의 선정 및 인쇄는 삼성 그룹의 연계 회사인 제일 기획에서 담당자가 나와서 서로 상의해 가면서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후 산부인과 의사회 활동을 할 때 많은 브러쉬어와 포스터도 제작을 하였고 내가 개인 병원을 개원하면서는 산모수첩과 아기 수첩도 직접 만들어서 썼다. 아기 수첩은 지금은 만들지 않고 정부에서 배포한 것을 쓰고 있지만 산모 수첩은 그후 계속 수정을 해 가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산모 수첩의 제작 경험과 노하우가 그 시절 얻은 거의 유일한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나는 1년 조금 못 남기고 삼성 의료원을 그만두었다. 이 글을 쓰면서 지난 시절을 돌아 보니 대기업을 그만두고 나서 그만 둔 이유와 그만두고 나서의 소회를 담은 글을 쓰거나 영상을 찍으신 분들이 있던데 지금 와서 보니 그 기분을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