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업 역사]
전에 동업하고 있을 때는 한 달에 두 번씩 격주로 산을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북한산을 등산한 적이 있다. 북한산은 다양한 코스가 있고 병원에서도 멀지 않아서 운동이 부족하고 마땅한 취미 생활이 없는 내게 안성맞춤인 산이었다. 백운대나 비봉 혹은 향로봉 같은 산의 정상에 올라가면 산 아래 작은 봉우리나 계곡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느 봉우리는 정상인 줄 알았지만 그저 여러 작은 봉우리 중에 하나였다는 것도 알게 되고 어떤 계곡은 너무 깊어서 그쪽으로 갔다면 한참을 헤매게 될 뻔했겠구나 싶은 곳도 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결정이나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던 것들이 나중에 인생의 후반쯤에 가면 그때가 내게는 삶의 큰 변곡점이었구나 혹은 그때가 정말 행복했던 때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지나고 보니 삼성 의료원을 그만둔 것은 나에게 있어 결혼과 의과대학 입학, 그리고 산부인과 전공 선택 다음으로 내 인생에서 큰 변곡점이었다. 원래 삼성 의료원을 들어갈 때는 잠깐 다니다 그만 둘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개업은 적성에 맞지 않을 것 같아 대학이나 대형 병원에 봉직하는 것이 나나 동기들 거의 대부분의 목표였다. 문제는 갈만한 대학병원이나 대형 병원이 마땅히 없다는 사실이다. 대학병원이야 각각 본교 출신이 진출하니 나로서는 서울대 병원이나 분당 서울대 병원 혹은 서울대병원에서 운영하는 보라매 병원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는 분당 서울대 병원이나 보라매 병원은 없을 때였다. 따라서 서울대 병원에 남아서 근무한다는 것은 성적도 모자라고 뒷배도 없는 내가 언감생심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통 아산 서울 병원이나 백병원, 원자력 병원, 국립 의료원 등에 취업하는 경우들이 흔했다. 삼성 의료원은 그 당시 거의 마지막으로 출범하는 대형 병원이었고 동기나 선후배 중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삼성 의료원에서 오래 근무하지 못했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11개월을 다니고 그만두었다.
다들 들어가지 못해 안달인 대형 병원에 대우가 좋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병원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너무 과중한 업무가 이어지다 보니 이렇게 살다가는 오래 못 살고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침 7시까지 출근해서 밤 11시 정도에 퇴근하는 생활이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잠은 하루 5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 건강도 그리 좋지 못한 내 처지에 그런 생활을 몇 년씩 혹은 평생 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그곳에 근무하는 모든 의사들이 그런 혹독한 근무를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나는 제일 나이 어린 막내 의사라서 진료는 진료대로 하면서도 의국의 온갖 잡무도 처리해야 하고 각종 세미나 준비와 전공의들의 교육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이렇게 고생할 바에는 차라리 병원을 개업하여 힘든 만큼 보상도 많이 받는 것을 택하고 싶었다.
두 번째로는 대형병원이라는 조직이 주는 부담감이 컸다. 그런 큰 병원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나사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이는 비단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말단 직장인들이라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하루는 건강 검진 센터장님이 나를 찾아왔다. 산부인과 건강 검진의 세부 항목을 결정하는 것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최종 결정이야 산부인과 과장님이 하는 것이지만 당시 다른 시니어 의사들은 외국에 나가 있어 실무적인 일을 할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검진 항목들을 찬찬히 훑어본 나는 필요 없는 항목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고 아직 연구적인 단계의 종양 표지자 같은 것도 다수 들어가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항목들은 제외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말씀드렸더니 검진 센터장님은 의료원에서 막대한 적자가 발생할 것이고 그것을 보상하려면 검진 센터에서 수입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보통 동네 병원이든 대형병원이든 원칙적으로만 운영해서는 수익을 내기 쉽지 않다. 대형병원의 경우 검진 센터, 장례식장, 그리고 카페와 매점 등 원내의 각종 상업 시설에 대한 임대 사업을 통하여 적자를 메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결국 100만 원도 넘는 비용의 검진 항목들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검진 센터장님의 그런 주장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살면서 그런 고민을 항상 했다. 10에서 1 정도의 불법 혹은 과잉 진료를 해서라도 병원을 유지하면서 산모들의 출산을 돕고 아픈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도록 진료를 하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교과서와 법에 정한 원칙적인 진료를 철저히 하다가 운영이 안되어 폐원하게 되어 산모의 출산을 돕는 일도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진료도 못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맞는 것인지 항상 고민이었다. 최선이라면 좋지만 내가 가진 선택지에서 그것이 없을 경우 차선과 차악 중 어느 것이 나은지 하는 고민 말이다. 살면서 보니 모든 것이 좋은 최선과 모든 것이 나쁜 최악의 상황이나 인간은 거의 보지 못했다. 대부분 차선이거나 차악이었다. 철저히 악으로만 뭉친 완벽한 악인도 없었고 한점 결함도 없는 완벽한 선인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이런 점은 좋았고 저런 점은 나빴다. 그런 스펙트럼의 중간 어디쯤에 우리 모두가 있었으며 세상사도 그랬다. 그리고 사실 어느 것이 차선이고 어느 것이 차악인지 그 둘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지금까지 30년째 나는 어떻게 사는 길이 맞는 길인지 모른다. 길고 가늘게 10%쯤의 비겁이 섞여 있는 의사로 사는 것과 짧고 굵게 일체의 비겁도 없이 잠깐의 의사로 사는 것. 어느 것이 나의 길인지... 비록 빚이 많지만 나는 아직 문을 닫지 않고 개업을 하고 있으니 아마 나는 다른 의사보다는 1%쯤은 솔직하게 9%쯤의 비겁함을 감수하는 의사일 것이다. 비겁의 정도는 개업 의사나 대형 병원 혹은 대학 병원의 의사 다를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소신이며 서있는 위치에 따라 비겁의 정도가 정해지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정답을 찾지 못하는 문제라면 어쩌면 정답이 없는 문제이거나 전제가 틀린 문제일 수도 있다. 결국 산다는 것이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의사로서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삼성 의료원에 계속 남아 폼나는 의사로, 의과대학의 교수로서 살아 보는 삶도 그리 나쁘다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지금 동물의 왕국과도 같은 야생의 개업 의사 생활을 하게 된 것에 대하여도 후회는 없다. 비겁이든 원칙이든 내 삶을 내가 좀 더 주도적으로 결정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