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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랑심 Feb 16. 2022

Ep4. 은평구 개업 시절 1

[나의 개업 역사]

삼성 의료원을 갑작스럽게 그만두게 되어서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전혀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젠 대형 병원에 취직하는 선택은 더 이상 고려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개업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좀 쉬고 개업해도 좋았을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장래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걱정과 조바심에 바로 개업 자리를 알아보았다.  어디에 개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산부인과 의국의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은평구에 있는 병원에서 임대로 들어올 의사를 찾는 중이라며 산부인과 과장님께서 관심이 있으면 한번 가서 상의해 보라는 것이다. 나는 중고등학교는 동대문구에 있는 학교를, 대학교는 종로구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집은 내내 중랑구에서 살아서  은평구는 살면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방의 경우에는 학연이든 지연이든 연고도 중요하지만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개업할 때는 연고가 있는지 없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의국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바로 소개받은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은 은평구 응암 5 거리에 있었다. 가면서 보니 다세대 주택도 많고 높은 건물은 없이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아파트 단지나 단독 주택, 사무용 건물이 많은 동네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응암동은 개업 장소로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지역이었다.  

산부인과든 다른 진료 과목이든 개원 장소를 정하는 일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 음식점이나 병원이나 단골을 확보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 개업을 하면 자리를 이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병원의 개업 장소를 결정하는 일은 힘들고 고민스럽다. 개업 장소 선택을 돕는 업자들이 따로 있을 정도고 컨설팅 비용은 수백만 원으로 비쌌다. 아파트 단지나 단독 주택은 이미 출산을 끝내고 경제력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출산 인구가 많지 않다. 사무용 건물이 많은 동네도 산부인과 특히 출산하는 산부인과를 이용할 만한 고객이 별로 없어서 개업 장소로 좋지 않다. 반면 연립과 같은 다세대 주택은 신혼부부가 많이 살기 때문에 좋은 입지 조건으로 본다.  물론 내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미 산부인과 의원이 개원하고 있던 곳이니까 입지 면에서는 어느 정도 검증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병원은 평범한 흰색의 3층 단독 건물이었다. 원래 계시던 원장님이 간암으로 더 이상 병원을 운영할 수 없게 되어서  인수할 의사를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 3층으로 올라가서 거실에 누워 계시는 원장님을  만나 뵈었다. 60세 언저리쯤의 나이에 비해 훨씬 수척하고 한눈에도 병세가 상당히 깊어 보였다. 긴 말씀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이런 처지가 되고 보니 여러 가지가 후회가 된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병원 하시면서 돈은 남 부럽지 않게 많이 벌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여행도 거의 다녀 보지 못했다고 하셨다. 성격도 검소하신 편인지 차도 현대 자동차에서 만든 엘란트라라는  소형차를  타셨다. 좀 더 즐기면서 살걸 그랬다는 말씀에 돈도 많이 버신 분이 왜 그렇게 사셨을까 하는 마음에 안쓰럽기도 하고 다소 의아하기도 했다. 산부인과 의사에게 진료실이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것을 나도 얼마 안 가서 깨닫게 되었다. 그분은 내가 병원을 인수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인수한 병원은 6개월 이상 문을 닫았던 상태였지만 내부 시설이 아주 낡지는 않았다.  외부 수리는 간판만 바꾸어 달고 다른 것은 그대로 두었고 내부는 천장이 주저앉은 곳이 있어 그것만 수리를 했다. 군 대체 복무로 지방 의료원에 근무하면서 조금 모아 놓은 돈과 삼성 의료원에 근무하면서 모아 놓은 약간의 돈으로 몇 가지 의료 장비를  구입했다. 초음파 같은 비싼 의료 장비는 리스로 구입하였는데 다달이 내는 비용이 500만 원쯤이라 적지 않았다. 

병원 내부는 그리 편한 구조는 아니었지만 지하실이 있어 물품 창고로 쓸 수 있었고 세탁실도 넓었다. 그 후 개업했던 곳들은 비싼 임대료 때문에 세탁실을 좁게 만들었는데 그 때문에 아내의 불만이 많았다. 옥상이 있어서 여름에는 직원들과 함께 삼겹살도 구워 먹었다. 멀리 가지 않고도 야유회 기분을 낼 수 있어서 좋았다. 내부만 간단히 수리하고 개업한 첫날 외래 환자는 18명을 봤다. 개업 첫날 치고는 굉장히 많은 숫자였다. 사실 내가 지금 보는 외래 환자도 20여 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개업 후 며칠 지났을 때 아내와 함께 옥상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저 멀리까지 야트막한 다세대 주택들이 빽빽하게 눈에 들어왔다. 밀집한 집들을 보면서 아내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한 10년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서 이 건물도 사고 노후 대비를 한 다음에는 힘든 분만은 하지 말고 가볍게 외래 진료만 하면서 지내자. 이 건물의 원장님처럼 일만 하다 죽으면 너무 억울한 일이니 우리는 그렇게 살지 말자고 말했다. 내가 병원을 인수하던 그때가 대략 1995년쯤이니 계획대로라면  나는 2005년쯤에는 분만은 하지 말고 편하게 외래 진료만 하고 있어야 하는데 개업 기간이 10년의 3배인 3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나는 아직 산모들의 출산을 돕는 것이 주된 업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나 시간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내가 전에  안쓰럽게 보면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했던 원장님보다 나는 결코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했다. 나의 무엇이 과연 그 원장님보다 나은 것이 있을까? 모아 놓은 재산도 없고 빚만 가지고 있는 것에서 보듯 삶은 희망과는 동떨어지게 굴러가는 경우가 비일 비재하다.  하루하루의 삶이 버겁기만 한 것은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으로 그저 작은 위안을 삼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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